목차
〈을사조약 이후의 의병활동〉
(1) 충청도 의병의 항쟁
(2) 전라도 의병의 활동
(3) 경상도 의병의 항쟁
〈의병 항일전의 의의〉
(1) 충청도 의병의 항쟁
(2) 전라도 의병의 활동
(3) 경상도 의병의 항쟁
〈의병 항일전의 의의〉
본문내용
군대와의 항전이 적어도 5, 6년간은 지속되었다.
그들은 화력과 근대식 군대 훈련에 대한 열세를 스스로 몸에 익혀온 게릴라 전술로써 보강해 가면서 항전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청일노일전쟁에서 승리하여무적 황군으로서 군림하기 시작한 일본군을 몇 년을 두고 괴롭혔으며,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의한국 병합을 그만큼 지연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에서 이미 러시아로부터 한국 병합의 묵인을 얻고 있었으며, 그후 제2차 영일 동맹(英日同盟)과태프트가쓰라 밀약이라는 미일 협상으로 당시 열강과의 국제 정치에 의해서 한국 점유의 공인을 받고 있었으나, 의병의 격렬한 항전이 1910년의 소위 합방 조약 직전까지 지속됐던 때문이었다.
아무튼 최후의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의 항전의식과 그 활동은 1910년을 전후해서 있었던 우리 민족의 기본 의식과 저항으로서 재평가되어도 좋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의병이 비록 법제적 의미로서 국군(國軍)이 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사실적 의미로서는 민족의 군대로서 그 의무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한말 군대의 국가 보호의 전통을 의병이라는 명분으로 계승했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셋째, 의병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의병의 성격과 특징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이성은 고대 이후의 사실을 들더라도,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왜한거란몽고여진 등의 침략을 빈번히 당하면서 부단히 그들에게 항전해서 민족사를 계승했으며,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그러한 국란에 봉착할 때마다 당시의 국가 군대이었던 관군의 활동도 컸다 하겠으나, 이에 못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항전 활동이었다. 그 비근한 예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의 의병활동에서 공적을 올렸던 것은 기본적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은 처음에는 훈련도, 무기도 없이 전투부대로서는 커다란 결함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러나, 각처에서 유명한 유림과 전직 관료들이 각자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직이 없는 집단에 불과했으면서도 그후 실전에 있어서 성공을 거둔 이유는 전투 과정에서 스스로 전투 부대로의 조직을 갖추기도 하며, 민간 무기를 모아 화력을 강화한 면도 있었으나 관군으로부터 이에 못지 않은 무기를 지원 받았고, 관군의 편성을 모방해서 부대 개편에 성공했던 때문이다.
이와 함께 모든 조직과 무기를 관군과 동일화시켰던 때문이다. 마침내는 관군으로서 지휘 계통이 통합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군대 통제하에 편입되었으므로, 외적과의 항전에서 군력의 총화가 이루어져 침략군을 격퇴하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말의 을미와 을사의병의 경우는 이것과 성격이 크게 달랐다. 국가의 관군은 있었으나 그들은 일본의 사주를 받아 도리어 의병을 토벌하는 역현상을 빚었다. 그리하여 한말의 의병은 애초부터 국가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영웅주의의 경향을 띤 개별 행동으로서 항일전을 수행하도록 되었으므로, 효과적인 전적을 거두어 위력을 과시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대국적 견제에서는 이상과 같다 하겠으나, 대다수의 경우는 의병 부대 상호간에 시종일관 주위부대와의 통합 또는 연합 전선이 형성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예는 1907년 12월 양주에서 전국 각지로부터 모인 1만을 호칭하던 의병이 13도 의병 총대장에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함과 동시에 군사장에 허위(許蔿), 관동 창의 대장에 민긍호(閔肯鎬), 호서 창의 대장에 이강년(李康秊), 관북 창의 대장에 정봉준(鄭鳳俊)을 선출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 병력을 24진으로 편성해서 일제통감부가 있는 서울에의 진공 계획을 세워 활동을 개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근대의 군대와 같이 명령 계통이 일원화하여 작전과 용병이 같은 계획 하에서 수립추진되는 체제에는 이르지 못한 표면적인 통합이었다. 그러므로, 서울 진공의 꿈이 깨어지고 본래대로 각 부대 단위의 활동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궐기한 의병활동이 통합의 계기를 획득하지 못한 점에 한말 의병의 한계성이 있다 하겠다.
그 뿐만 아니라, 한말 의병의 각 부대도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무장 활동의 특성인 전투로써 승리를 거둘만한 편성이라고 볼 수 없는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법제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신분제가 타파됐으니 실제 사회의 통념으로서는 반상(班常)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평등 사회로 지향하는 전기적 혼란 현상을 빚었기 때문에 의병 부대 내에도 실제 전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계급적 갈등이 심각했다.
그 결과 후기 의병이었던 정미의병의 경우에는 평민의병장이 다수 등장했으며 그들의 활동이 때로는 다른 의병 부대보다도 우수했다. 김백선(金伯善)의 을미의병 활동과 신돌석(申乭石)의 의병활동은 그 좋은 예이다. 아무튼 의병 부대의 이러한 전통 관념은 후기 활동에 있어서 점차 희박해졌으나 아직도 전통사회의 기본적인 모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의 편성이었으므로, 그 조화를 얻지 못하여 항일전의 전력을 약화시킨 속성이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로서 상술한 김백선이 유인석의 병진(兵陣)에 통합된 후 군율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살해됐던 일을 둘 수 있다.
한말 의병활동에 관해서 강조할 수 있는 가장 큰 점은 50년간에 걸친 근대 항일 민족 운동사의 큰 경향 가운데, 무력에 의한 자주적인 항일전을 계속하자는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민족 군대의 양성과 그 활동의 선도적 역할이다. 이런 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비록 일시적으로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은 바 있어도 스스로 독립하는 길을 개척했다 할 수 있으며, 그 전통은 정신적 면에서 민족의 자립 역량에 의한 항일 운동을 확립하였다 하겠다.
참고문헌
《도전과 응전의 우리나라 근대 100년》, 이현희 著, 새문사, 1997, 서울
《한국독립운동사》, 國家報 處 발행, 1993
《의병과 독립군》, 윤병석 著,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서울
그들은 화력과 근대식 군대 훈련에 대한 열세를 스스로 몸에 익혀온 게릴라 전술로써 보강해 가면서 항전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청일노일전쟁에서 승리하여무적 황군으로서 군림하기 시작한 일본군을 몇 년을 두고 괴롭혔으며, 한민족의 주체의식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의한국 병합을 그만큼 지연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1905년의 포츠머스 조약에서 이미 러시아로부터 한국 병합의 묵인을 얻고 있었으며, 그후 제2차 영일 동맹(英日同盟)과태프트가쓰라 밀약이라는 미일 협상으로 당시 열강과의 국제 정치에 의해서 한국 점유의 공인을 받고 있었으나, 의병의 격렬한 항전이 1910년의 소위 합방 조약 직전까지 지속됐던 때문이었다.
아무튼 최후의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의 항전의식과 그 활동은 1910년을 전후해서 있었던 우리 민족의 기본 의식과 저항으로서 재평가되어도 좋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의병이 비록 법제적 의미로서 국군(國軍)이 될 수는 없었다 하더라도, 사실적 의미로서는 민족의 군대로서 그 의무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한말 군대의 국가 보호의 전통을 의병이라는 명분으로 계승했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셋째, 의병활동에서 주목할 점은 의병의 성격과 특징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이성은 고대 이후의 사실을 들더라도,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왜한거란몽고여진 등의 침략을 빈번히 당하면서 부단히 그들에게 항전해서 민족사를 계승했으며, 한민족의 고유문화를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그러한 국란에 봉착할 때마다 당시의 국가 군대이었던 관군의 활동도 컸다 하겠으나, 이에 못지 않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의 항전 활동이었다. 그 비근한 예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 활동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 때의 의병활동에서 공적을 올렸던 것은 기본적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각 지방에서 일어난 의병은 처음에는 훈련도, 무기도 없이 전투부대로서는 커다란 결함을 가진 집단이었다. 그러나, 각처에서 유명한 유림과 전직 관료들이 각자 편성한 것으로서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직이 없는 집단에 불과했으면서도 그후 실전에 있어서 성공을 거둔 이유는 전투 과정에서 스스로 전투 부대로의 조직을 갖추기도 하며, 민간 무기를 모아 화력을 강화한 면도 있었으나 관군으로부터 이에 못지 않은 무기를 지원 받았고, 관군의 편성을 모방해서 부대 개편에 성공했던 때문이다.
이와 함께 모든 조직과 무기를 관군과 동일화시켰던 때문이다. 마침내는 관군으로서 지휘 계통이 통합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군대 통제하에 편입되었으므로, 외적과의 항전에서 군력의 총화가 이루어져 침략군을 격퇴하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말의 을미와 을사의병의 경우는 이것과 성격이 크게 달랐다. 국가의 관군은 있었으나 그들은 일본의 사주를 받아 도리어 의병을 토벌하는 역현상을 빚었다. 그리하여 한말의 의병은 애초부터 국가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영웅주의의 경향을 띤 개별 행동으로서 항일전을 수행하도록 되었으므로, 효과적인 전적을 거두어 위력을 과시할 만한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대국적 견제에서는 이상과 같다 하겠으나, 대다수의 경우는 의병 부대 상호간에 시종일관 주위부대와의 통합 또는 연합 전선이 형성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중 대표적인 예는 1907년 12월 양주에서 전국 각지로부터 모인 1만을 호칭하던 의병이 13도 의병 총대장에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함과 동시에 군사장에 허위(許蔿), 관동 창의 대장에 민긍호(閔肯鎬), 호서 창의 대장에 이강년(李康秊), 관북 창의 대장에 정봉준(鄭鳳俊)을 선출한 것이다. 그리하여 전 병력을 24진으로 편성해서 일제통감부가 있는 서울에의 진공 계획을 세워 활동을 개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근대의 군대와 같이 명령 계통이 일원화하여 작전과 용병이 같은 계획 하에서 수립추진되는 체제에는 이르지 못한 표면적인 통합이었다. 그러므로, 서울 진공의 꿈이 깨어지고 본래대로 각 부대 단위의 활동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전국에서 궐기한 의병활동이 통합의 계기를 획득하지 못한 점에 한말 의병의 한계성이 있다 하겠다.
그 뿐만 아니라, 한말 의병의 각 부대도 대개의 경우에 있어서 무장 활동의 특성인 전투로써 승리를 거둘만한 편성이라고 볼 수 없는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법제적으로는 전통 사회의 신분제가 타파됐으니 실제 사회의 통념으로서는 반상(班常)이 그대로 존재하면서 평등 사회로 지향하는 전기적 혼란 현상을 빚었기 때문에 의병 부대 내에도 실제 전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계급적 갈등이 심각했다.
그 결과 후기 의병이었던 정미의병의 경우에는 평민의병장이 다수 등장했으며 그들의 활동이 때로는 다른 의병 부대보다도 우수했다. 김백선(金伯善)의 을미의병 활동과 신돌석(申乭石)의 의병활동은 그 좋은 예이다. 아무튼 의병 부대의 이러한 전통 관념은 후기 활동에 있어서 점차 희박해졌으나 아직도 전통사회의 기본적인 모순이 지속되는 상황에서의 편성이었으므로, 그 조화를 얻지 못하여 항일전의 전력을 약화시킨 속성이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로서 상술한 김백선이 유인석의 병진(兵陣)에 통합된 후 군율을 어겼다는 죄명으로 살해됐던 일을 둘 수 있다.
한말 의병활동에 관해서 강조할 수 있는 가장 큰 점은 50년간에 걸친 근대 항일 민족 운동사의 큰 경향 가운데, 무력에 의한 자주적인 항일전을 계속하자는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민족 군대의 양성과 그 활동의 선도적 역할이다. 이런 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비록 일시적으로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은 바 있어도 스스로 독립하는 길을 개척했다 할 수 있으며, 그 전통은 정신적 면에서 민족의 자립 역량에 의한 항일 운동을 확립하였다 하겠다.
참고문헌
《도전과 응전의 우리나라 근대 100년》, 이현희 著, 새문사, 1997, 서울
《한국독립운동사》, 國家報 處 발행, 1993
《의병과 독립군》, 윤병석 著,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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