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청년학생운동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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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시대 청년학생운동 보고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1920년대 청년학생운동의 전개
1. 청년학생운동의 대두배경
2. 청년학생조직의 대두와 활동
2-1. 청년운동조직의 확산과 활동
2-2. 학생조직의 대두
3. 1920년대 동맹휴교와 광주학생운동
3-1. 1920년대 동맹휴교의 양상
3-2. 광주학생운동

2. 1930년대 청년학생운동의 전개
1. 1930년 초 청년학생운동의 변화
1-1. 조선청년총동맹의 해소
1-2.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운동
1-3. 학생반제동맹
1-4. 학생계몽운동
2. 일제말기의 청년학생운동

Ⅲ. 결론

본문내용

1932
1933
1934
1935
6
22
24
8
5
136
414
302
29
152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상반기
6
16
48
57
46
16
26
121
203
409
198
42
* 홍석률, 앞의 책, p338 인용
중일전쟁 때부터 국내 대중들 사이에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는 말들이 유언비어로 돌고 있었다. 1937년 7월부터 1939년 9월까지 유언비어죄로 집계된 건수는 총 237건, 360명에 달했고, 그 중에서 청년층이 107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단순히 반일/반전/반군사상이나 사회에 대한 불평불만, 종교관련 등만이 아니라,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등 사상범죄와 관련된 것도 있었다. 변은진, 앞의 책, p. 498 참조.
대중들은 일제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서구열강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패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학생운동은 이전과 다르게 무장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 선진적인 청년층은 국경부근에서 잦은 전투 소식 등을 접하면서 이른바 ‘김일성부대’ 등에 대해 많은 환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졸업 후 만주 등지에 무장투쟁을 하겠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변은진, 앞의 책, p. 503 참조.
또한 중일전쟁 말기 들어 총포, 화약류의 절취사고가 많이 발생한 점도 이를 뒷받침 한다.
1940년 이후부터는 학생운동에도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이념의 차이를 불문하고 반일이라는 기치아래 모든 세력을 결집하는 시도들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예는 조선인해방투쟁동맹이다. 이 조직의 1940년 창립취지를 보면 “본회합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신봉자의 회합으로서 그 주의는 상이하나 조선민족해방을 위항여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목적은 서로 일치하므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조직한다”고 밝히고 있다. 홍석률, 앞의 책, p. 341 참조.
1943년 12월에 시행된 학도지원병제는 학생운동의 무장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협동당이나 지리산의 보광당 모두 학도지원병제 거부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학병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항일운동조직에 참여하거나, 집단적으로 모반사건을 일으키는 등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펼쳐나간다. 홍석률, 앞의 책, p. 340 참조.
한편 민족주의 학생운동 진영의 주류적 경향이었던 ‘실력양성론’적 입장의 학생들의 경우, 첫째는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호응해 무장투쟁을 할 수 있는 결정적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실력양성을 통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둘째 기본적으로 국내외 민족해방운동 세력과 민중들의 의해 독립을 쟁취해야 하지만 미/영/소 등의 국제적 원조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는 극단적으로 나아가 조선을 일본의 자치령으로 하자거나, “일본이 패전해서 미군이 침입하게 되면 ... 독립의 원조를 구하려 해도 영어를 못하면 안되므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자”라는 주장까지 제기해 주체적인 독립의 의지를 스스로 져버리는 문제까지 낳기도 했다. 이밖에도 전북 이리에서 금융조합 직원으로 조직된 ‘호남회’에서는 1945년 살포한 삐라의 슬로건에서도 ‘영어공부를 하자’, ‘미군상륙시에 대비하여 여론을 환기하라’, ‘조선어 기관지를 돌리자’ 등의 주장이 있었다. (전북지역 독립운동사 중); 변은진, 앞의 책, p519.
Ⅲ. 결론
일제하 청년학생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중요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시대의 모순에 먼저 고민하는 청년의 감수성을 갖고 있기도 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실천의 용기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절대적인 명제는 아닌 것 같다. 앞서 살펴본 일제하 청년학생의 운동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렇다.
3.1 운동, 6.10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에서 청년학생운동은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은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의 성장과 함께 학생운동의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이는 어쩌면 운동의 합법칙적인 발전과정에서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변화된 지형 안에서 청년학생운동의 부문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는 점도 보아야 한다.
물론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운동진영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농민조합 운동으로의 이전과 집중, 민족주의 운동진영의 농촌계몽운동, 학생반제동맹 등의 다양한 시도들을 벌여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전체운동 속에서 청년학생운동을 대중운동 차원에서 재배치하고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활동가/운동가 중심으로 재편되는 결과를 낳았다.
1940년 대 이후 청년학생운동은 일본의 패망분위기 고조와 함께 무장투쟁까지도 나서게 되지만, 이 역시 전체 청년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조직력 없는 고립분산적이었고, 실제로 실행의 단계까지 가지 못하고 계획의 단계에서 좌초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선의 독립투쟁이라는 자기과제에 대한 청년학생층의 조직적 단결과 전체운동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지만 전체 청년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고 단결할 수 있는 구심체로서의 조직을 건설하지 못했던 점, 전 사회적으로도 전체운동을 일본제국주의와 맞서는 단일한 구심체가 없었다는 점도 자연발생적인 청년학생운동을 목적의식적으로 끌어올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도 청년학생운동의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민주화운동을 선도했던 80년대의 청년과 학생들은 이제 장년이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청년학생들이 지금의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하지만 80년대의 청년학생들이 채웠던 자리와 2000년대의 자리는 분명히 변화했고, 변화하고 있다. 변화된 2000년대의 자리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지금의 청년학생들의 과제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한국 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한국 근현대청년운동사』, 풀빛, 1995
민족사 바로 찾기 국민회의,『독립운동총서 ⑧ 학생운동』, 민문고, 1995
전상봉,『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 두리미디어, 2004
한길사,『한국사 13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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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7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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