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말여초 호족에 대한 연구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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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말여초 호족에 대한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호족세력 형성의 요인

Ⅲ. 호족세력의 대두

Ⅳ. 호족세력의 존재형태
1. 성주․장군의 성격에 대한 검토
2. 평산 박씨가문 세력에 대한 검토
3. 호족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검토

Ⅴ. 호족연합정권설
1. 성립과 그 내용
2. 비판

Ⅵ. 결론

본문내용

수 있다. 매곡인 경종이 주동이 되어 벌어진 이 사건은 매곡 인근 지방 출신 사람들이 결탁하여 박춘길을 이용해서 인질을 구출한 후, 본향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된 것이다. 비단 이 두 모반 사건뿐만 아니라, 여타의 모반 사건 또한 출신성분을 분석하여 볼 때, 지방의 강력한 호족출신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결정적으로 왕건이 즉위할 당시, 호족들의 연합세력이 활약하여 궁예가 축출되었다고는 하나, 증거가 될만한 문헌사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왕건정권이 굳이 호족연합정권을 구성할 필요성이나 명분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젠 호족들의 이익을 대변했다는 광평성과 순군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다. 광평성의 경우 궁예정권 시대에는 그 역할이 정치를 관장함과 동시에 호족들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건정권에서는 관직을 개편함과 동시에 그 영향력이 매우 커지게 되었지만, 이전처럼 호족의 이익을 대변한다고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근거로서 광평성의 장차관들이 모두 왕건 휘하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처음 재직한 김행도가 궁예의 구신인 것을 제외하고, 유척량최응염상 등등 그 대부분의 인물들이 왕건의 측근 중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문적인 행정관료였거나 왕건의 신망을 얻은 문무겸전의 뛰어난 인물로서, 호족세력과는 상대적 위치에 있었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광평성이 더 이상 호족세력의 협의체적 역할을 수행한 기관이나 호족의 출사처라고 하기에 힘들다고 할 수 있다. 왕건의 건국 직후에 왕권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중앙관부의 중견관리직에 공교롭게도 순군부와 관련이 있었던 상당수의 인물들이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태평과 현율을 들 수 있다. 태평의 경우 왕건에게 발탁되기 전까지 일개 군졸의 신분이었으나,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반면 현율의 경우 왕건이 중용하려 하였으나, 개국 일등공신인 배현경 등이 강력히 반발하였다고 한다. 현율은 왕건의 측근인사로 알려져 있는데, 이와 같은 인물을 순군부의 핵심관료로 임명하려 하자, 호족이 아닌 왕건의 심복들이 반발했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순군부가 호족이나 지방세력들과 긴밀한 관계기관적 성격이나 호족의 군사 통수부적 성격을 찾아볼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히려 왕건정권과 밀착된 왕권강화적 기능을 가진 기관으로서 군무와 국방문제에 관한 업무를 병부와 나누어 분담하는 부서였던 것이다. 이는 오히려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호족견제 기구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아 볼 것은 바로 왕건의 결혼정책이다. 호족들 간에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환으로 시행된 결혼정책은 왕건의 정권 장악에 큰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왕건의 경우 6명의 왕후와 20명의 후비를 거느리고 있었고, 그의 자식들 또한 공신과 여러 호족들과 결혼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결혼정책은 호족들과의 연계를 위해 실행된 것으로, 왕건정권을 유지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 결합이 단순하게 왕권의 미약함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공신들에게는 일종의 포상으로, 지방 호족들에게는 믿음과 신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일종의 시혜적 성격을 지닌 행사였던 것이다. 특히 수많은 후비들의 신분을 보면, 호족을 비롯해 왕족장군학자관료 등 그 출신성분이 매우 다양하다. 즉, 강력한 세력을 지닌 호족들과의 단단한 결합을 통해 왕권을 유지하려 하였다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는 왕건의 결혼정책이 정권유지를 위한 정략적인 성격만을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Ⅵ. 결론
羅末麗初에 존재하였던 지방세력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도적초적은 물론이고, 두목소족장군벌성주 등등 아주 다양하다. 그리고 이들은 통틀어 호족이라 지칭하게 된다. 이러한 호족의 개념은 먼저 혈연집단을 기초로 한 촌락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호족들은 성주나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지방사회를 통치하고 중앙의 정치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갖추면서 점차 세력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은 군사력경제력정치권력 등을 바탕으로 문화나 종교 발전에 이바지하여 크게 민심을 사게 되어, 일국의 군주와도 같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호족들 중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은 비교적 세력이 작은 호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넓히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다. 물론 이들은 일반적인 호족세력과는 근본적인 신분이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강한 카리스마와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많은 호족세력을 규합하고, 일부는 통치한다. 그리하여 후백제와 후고구려라는 호족연합정권이 탄생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후백제의 경우 전라도와 충청도 일부 지역 등 옛 백제의 세력권을 그대로 통치하였고, 후고구려의 경우 경기강원 지역 및 충청도 일부 지역 등 옛 고구려의 세력권을 그대로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이들의 영토적 기반이 전통적으로 반신라적 성격이 강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의 주요 구성원 또한 옛 백제고구려 유민이 많다는 것도 특이할 만한 사항이다. 궁예와 견훤은 이와 같은 점을 잘 이용하여, 그들의 국가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하지만 궁예와 견훤은 모두 백제나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방의 호족들과 연계하여 세력 확장과 동시에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궁예정권과 견훤정권 모두 다분히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에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게 되는 왕건 역시, 궁예정권의 세력을 흡수하여 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이렇게 호족의 형성과 호족세력의 대두, 그리고 호족연합정권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족은 신라 말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한 지방 세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10세기 초의 호족의 등장은 이후 중세사로 넘어가는 과도기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사적 사건 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으며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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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12
  • 저작시기2006.0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6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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