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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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북국시대의 상황과 문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동아시아 문학의 판도

2. 발해문학의 위치

3. 발해문학의 작품

4. 신라 문학과 대외관계

5. 신라 한문학의 성숙
5.1. 신문왕과 설총
5.2 전성기에 이룬 작품
5.3. 말기의 상황과 왕거인
5.4. 최치원의 성공과 번민
5.5. 최광유▪ 박인범 ▪ 최승우 ▪ 최언위

본문내용

이고,
東門驅馬草靑靑 동문을 말로 달리는데 풀이 푸르구나.
不唯兒女多心緖 아녀자 아니어도 마음이 여러 갈래여서,
亦到離筵盡涕零 헤어지는 자리에 이르면 온통 눈물을 흘리노라.
월이나 진은 서로 멀리 떨어진 고장이다. 그런 곳들을 돌아다니느라고 나그네의 신세한탄이 깊어진다. 장정은 십리마다 두어 쉬어갈 수 있게 한 정자이다. 장정이나 찾아 잠시 머무르는 처지라 술동이나 노래 외에 바랄 것이 없다 했다. 배를 타고 말을 달리면서 부는 바람과 자란 풀을 말한 대목에서는 산뜻한 기상을 보이다가, 이별의 눈물을 흥건하게 흘리면서 시를 끝냈다.
뛰어난 시라고 하겠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호하다. 같은 시기에 당나라에 가서 공부한 다른 시인들도 섬세한 감각과 아름다운 언어구사를 숭상하는 당나라 말기 이른바 만당(晩唐)의 시풍을 따랐지만, 그런 경향을 최승우의 이런 작품이 특히 잘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후대에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귀국을 한 다음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신라에서 얻지 못하고 후백제 견훤에게로 갔다. 후삼국 가운데서 어느 쪽이 통일을 이룩하느냐하는 결판을 내야 하는 마당에 한가로이 풍월을 읊고 있을 수 없었다. 강포한 군사를 이끌고 무자비한 정복을 일삼는 견훤이라도 나라를 다스리고 외교전을 펴자니 문신이 필요했다. 최승우가 그 일을 맡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奇高麗王書)라는 이름으로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는 그 편지 한 대목을 들어보자.
족하는 충고하는 뜻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서 다만 떠도는 말만 들으며 백 가지 꾀를 엿보고 다방면으로 침략을 했지만, 아직 내 말 머리를 보지 못하고, 내 소 털 하나 뽑지 못했도다. 초겨울에는 도두(都頭) 색상(索相)이 성산 고을에 친 진 앞에서 손을 묶었고, 이 달에는 좌상 김락(金樂)이 미리사 절간 앞에다 해골을 버렸으니, 죽여 얻은 것이 이미 많을 뿐만 아니라, 추격해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도다. 강하고 약한 것이 이와 같으니 승부는 알 만하지 않은가. 평양 누각에 활을 걸고 패수의 물을 말이 마시게 하겠다고 기약하노라.
당나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의 불안한 정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명문을 쓰는 역량을 정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한창 강성할 때 거듭되는 승리를 자랑하면서 고려를 위협하던 견훤의 포부와 기상을 살기가 서리기까지 한 표현을 구사해 아주 잘 나타냈다. 평양 누각에 활을 걸고 패수의 물을 말이 마시게 하겠다는 대목에서 후백제가 후삼국을 통일 하겠다는 의지를 최대의 위엄을 갖추어 천명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최승우는 공신의 자리를 굳히고 누대의 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후백제는 결국 패망했다. 최승우의 글 쓰는 능력으로 패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기개가 넘치는 명문만 남아서 그때의 상황을 실감 나게 회상할 수 있게 한다.
5.5.4. 최언위
최언위(崔彦 , 868~944)는 처음 이름을 인연(仁 )이라고 했다. 나고 죽은 해가 밝혀져 있고, 생애도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져 있는 점이 지금까지 고찰한 사람과는 다르다. 885년에 당나라 유학을 떠나 과거에 급제했으며, 909년에 귀국해 신라의 벼슬을 얻었다가 생각을 바꾸어 고려로 갔다.
신라 말 뛰어난 문장가 삼최(三崔)가 있었다고들 한다. 자료에 따라서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최치원·최승우·최언위가 그 셋이라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최치원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최승우는 후백제를, 최언위는 고려를 택한 점이 서로 다르다. 후백제의 최승우는 실패했지만 고려에서 같은 구실을 맡은 최언위는 왕건을 도와 통일과업을 성취하는 큰 공을 세웠다. 최고의 관직에까지 이르는 영광을 누리고, 자손이 고려 귀족으로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했다. 신라문학이 고려로 이어지게 한 것도 특기할 사항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편지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가 <동문선>에 있다. 작가 미상이라 했는데, 최언위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승우가 쓴 견훤의 편지와 견주어보면 둘 다 명문이지만, 명문인 이유가 정반대이다. 힘을 자랑하지 않고 덕을 내세웠으며 어조가 부드럽다. 한 대목을 보자.
요즈음 삼한이 액운을 만나 구토(九土)가 흉년이 들어 황폐해져 많은 백성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갔으며, 말이나 들이 모두 적토가 되었도다. 풍진의 소리를 거의 멈추고 나라의 재난을 구하고자 하는 바 있어, 선린의 관계를 맺어 과연 수천 리 땅에서 농사짓고 길쌈하는 백성이 업을 즐기고 칠팔 년 동안 사졸이 한가하게 잠을 잤다. 그런데 유년(酉年) 시월에 갑자기 일이 생겨 서로 싸우게 되었도다.
마지막에서 한 말을 보면 싸우겠다는 뜻을 나타냈으며 평화를 간청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네 쪽은 백성을 생각하고 강토가 풍요해지기를 바라며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힘만 자랑하며 횡포한 짓을 일삼는 상대방을 나무라면서 평화 노선을 천명했다. 백성의 지지가 최상의 전투력이라고 하는 대응논리를 내세웠다. 편지 두 장이 후백제와 고령의 차이점을 잘 나타내준다. 군사력을 뽐내기나 하던 견훤은 너무 강해 망하고, 화해를 주장하고 덕치를 표방한 왕건은 부드러움을 무기로 삼아 세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최언위를 위시한 신라 육두품 출신 문인 유학자들은 신라를 버리고 고려를 택한 결과 진골귀족 때문에 억압을 받던 신분에서 벗어나 최고 지배층으로 상승했다. 신라에서는 배척되기만 한 오랜 소망을 실현해, 한문학과 유학으로 통치의 원리를 삼으면서 문치에 힘써서 덕화를 펴는 나라, 골품제를 철폐하고 과거제를 실시한 나라가 바로 고려였다. 신라 육두품 문인으로 쌓은 능력과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해 덧보탠 안목을 물려받아 더욱 키우면서 고려가 중세문명의 완성자가 되게 한 주역이 최언위와 그 동료들의 후선이었다.
※ 참고문헌
고전연구실, 「삼국사기(하)」, 과학원 출판사, 1959,
신형식, 「新羅痛史」, 도서출판 주류성, 2004,
이구의, 「新羅漢文學,硏究」, 아세아문화사, 2002.
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83,
이이화, 「남국 신라와 북국 발해」,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0
조동일, 「한국문학통사1」. 지식산업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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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19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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