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리카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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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리카도의 생애

리카도의 경제관

리카도 - 「경제원리」의 내용
1. 노동가치설
2. 차액지대론
3. 비교우위론
4. 임금론
5. 이윤론
6. 조세제도
7. 기계론

리카도의 평가

본문내용

번 사람은 별로 없다. 미국의 경제학자 새무엘슨(P.Samuelson)이 경제학 교과서를 써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 하나 기껏해야 휴양지에 아담한 별장 하나 살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번 경제학자 말고도 또 한 가지 드문 것이 있다. 백만장자가 열심히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다니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다. 백만장자는 자기를 부자로 만든 사회질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고 찬탄할 뿐이지, 거기에 뜯어고쳐야 할 측면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카도는 이 두 가지에서 모두 예외라는 점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다. 그는 주식, 채권, 부동산 추기를 통해 26세의 젊은 나이에 대단히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큰돈을 번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의회로 진출하게 된다. 의원으로서의 그는 금융개혁, 빈민구제, 관세철폐, 언론자유 등 당시의 사회분위기로 보아서는 과격하다 할 만한 개혁안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갑부 과격분자(millionaire radical)'라고 불렀다. 동서고금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어떤 한 사람에게 갑부라는 말과 과격분자라는 수식어를 동시에 붙이기는 어려운 법인데, 하여튼 재매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갑부면서 보수주의자인 것보다는 과격분자인 쪽이 훨씬 더 멋져 보인다.)
리카도는 여느 경제학자와 달리, 대학 같은 곳에서 경제학 강의를 한번도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는 열 네 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을 돕기 위해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하고 금융시장의 실무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총명한 머리와 훌륭한 말재주로 당대의 내노라 하는 경제학자들을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다.
<인구론>을 쓴 맬서스(T.Malthus)와 불황(不況)이 존재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놓고 벌인 격렬한 논쟁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뒤의 역사가 증명해 보인 바와 같이, 수요부족에 의해 불황이 나타날 수 있다고 장한 맬서스가 진실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싸움에서는 훌륭한 논쟁술을 지닌 리카도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케인즈는 그때 맬서스가 논쟁에서 이겼으면 경제학이 훨씬 더 빨리 진보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한다.(그러나 그 두 사람은 치열한 논쟁과정에서 서로의 장점을 발견하고 둘도 없이 좋은 친구가 되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일생 동안 저서라고는 <정치경제와 조세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한 권밖에 쓰지 않았지만, 리카도는 경제학의 여러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자유무역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이론적으로 입증한 일이다. 그는 비교우위설(比較優位設)을 통해 자유로운 교역이 이에 참여하는 모든 나라에게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각 나라가 필요한 모든 상품을 스스로 생산하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각 나라가 비교우위를 갖고 있는 상품만을 생산하여 다른 나라와 교역하게 되면 모든 나라의 국민들이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경제학교들에게 이와 같은 리카도의 논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여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끌어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중상주의(重商主義)의 잔재가 남아 있던 당시의 풍토에서 그의 주장은 혁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 사회에는 입으로만 자유무역을 외치고 마음속으로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의 신화를 믿고 있는 현대판 중상주의자들이 아직 까지도 도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리카도의 명쾌한 논리가 아직도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의 영국사회에서는 '곡물법(Com Laws0'의 폐지 여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시대를 대표하는 지주계급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한 곡물법이 계속유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곡물의 판매수입이 주요 소득원 이었던 지주들로서는 신대륙의 값싼 곡물이 국내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신진세력으로 떠오르는 산업자본가들은 곡물법이 당장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자본가는 곡물이 자유롭게 수입되어 가격이 크게 떨어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노동자들의 식품비가 적게 들고 따라서 적은 임금만 주고서도 그들을 고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리카도는 감연히 산업자본가의 편을 들어 곡물법이 폐지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폈다.
물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그의 기본입장도 곡물법 폐지론에 동참케 하는 또 다른 이유로 작용했을 것이다.이 예에서 보듯, 리카도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려 하는 산업자본가 계급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친기업적(親企業的)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인데,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그 면모가 더욱 두드러 진다. 그는 방임상태로 놓아둔 경제에서 성장이 극대화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정부가 기업활동에 대해 불필요한 간섭을 삼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고전파 경제학의 핵심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방임주의(自由放任主義, laissez-faire)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 교육은 물론 그 밖의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리카도가 치밀한 논리 하나로 당대의 지식사회를 풍미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상아탑의 창백한 지성과는 거리가 먼, 현실경제에 굳게 뿌리를 박은 뛰어난 활동가였다. 남부럽지 않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고서도 앞장서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은 배경에는, 유태인의 혈통을 타고나 보수적인 영국사회에서 여러 모로 서러움을 겪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심리적 배경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좀더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그의 정열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모은 돈이 조금 있다고 '개혁'이란 말만 나와도 진저리를 치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그의 삶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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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19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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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37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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