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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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사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수도원 에 들어갔으나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mulatt)이였기 때문에 평생 정식 수도사가 되지 못했다. 그는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 병자들뿐만 아니라 병든 동물들까지도 돌보았으며,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이 따 먹을 수 있도록 여러 촌락에 과일 나무들을 심었다.
스페인에 의해 마지막으로 정복된 지역은 현재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고 파라과이 들이다. 스페인은 몇 차례의 시도 끝에 1537년에 파라과이의 아순시온(Asuncion) 시에 성채를 건설했다. 이들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디언들의 도움 없이는 물자를 조달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인디언들에 대 한 대우는 상당히 관대했다. 프란치스코회 소속 선교사들은 자기들 이 건축한 촌락에 모여든 많은 인디언에게 유럽식 농경법과 아 러 기본적 기독교 신앙을 전수했다. 이들 선교사들 중 한 사람은 또한 성 토리비오의 요리문답을 이 지역 원주민들의 언어인 구아라니(Guarani)어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인근에 살고 있던 스페인 정착민들이 선교사들의 사역을 방해하거나 혹은 이를 파괴하는 일이 비일 비재했다. 원래의 계획대로 하면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회 수도사 들이 제수잇들을 대체해야 했다. 그러나 스페인 제국 전체에 걸쳐 무수한 공석(公席)이 있었으므로 이를 채우기에는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들이 부족하였다. 지도자를 상실한 많은 포교 소들은 결국 소멸되었다. 세속 당국은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인디언들을 착취하였으며, 새로운 선교사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뚜렷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으므로 인디언들은 그들을 불신하기 시작 하였다. 곧 포르투칼인들이 이 지역에 침투하여 노예사냥을 시작 하였다. 일부 스페인인들도 그 뒤를 따랐다. 1813년에는 포교소들이 이전의 1/3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러한 감소 현상은 계속되었다. 기 독교가 인디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시대 의 특이한 예외라 할 수 있었던 파라과이의 선교 활동도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의 물결을 끝내 견뎌낼 수 없었다.
제11장 포르투칼의 진출
포르투칼은 차스틸랴보다 거의 매년이나 앞선 13세기경 무어족 들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런데 이들은 카스틸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외부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바다였다. 15세기 전반기에 흔히 항해 왕이 라 불렸던 헨리 (Prince Henry the Navigator)는 아프리카 서해안의 탐험을 도모했다. 그의 적극적 지원 아래, 포르투칼인들은 14차례의 시도 후에 케이프 보자도르 Cape Bojador)를 통과하여 시에라 레온(Sierra Leone)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탐험의 배경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유럽과 극동 사이의 직접적 육로를 장악하고 있던 모슬렘 교도들을 우회하여 아프리카를 통과하거나 혹은 아프리카를 해로로 돌아 동양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또한 이디오피아의 존재에 관 한 막연한 소문이 유럽에 퍼졌으므로, 기독교 신자들은이 기독교 왕국을 발견하여 이들과 동맹을 맺어 모슬렘 신자들을 동시에 양면에서 협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탐험과 식민에 있어서는 노예의 공급이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결국 이 해안 지방은 포르투칼의 식민지가 되었다. 포르투칼은 주로 노예들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거대한 내륙 지방을 자기의 영토로 선포하였으며, 노예 상인들은 아프리카 인들을 해안 지방으로 실어 날랐다. 비록 이곳에도 교회가 설립되기는 하였으나, 이는 주로 포르투칼인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해안 지방에 거주한 소수의 아프리카인들만이 그 통치 하에 있었다. 포르투칼 당국의 눈으로 볼 때에는 앙골라 교회가 별로 중요치 않았으므로 저질의 성직자들만을 배당하였다.
교황이 장차 발견될 모든 영토를 스페인과 포르투칼에게 나누어 주었을 때만 해도 아무도 남아메리카 동단이 이러한 분계선을 가로지를 줄은 몰랐다.1500년에 역풍을 피하기 위해 보다 광활한 항로를 돼하여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동양을 향했던 포르투칼의 소함대가 오늘날의 브라질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소함대는 일 단 이곳을 탐사한 후 계속 동양을 향해 항해하였으며, 이들 가운데 선박 한 척은 리스본으로 되돌아와 당시 이들이 대서양의 한복판 에 있다고 생각하였던 새로운 영토의 발견 소식을 알렸다. 이와 함께 여러 가지 이유로 정착촌에서는 각종 난제들이 등장 하였는데, 이 정착촌은 결국 포르투칼인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타 모요 인디언들과 이들 가운데 거주하였던 몇몇 프랑스인 패잔병들 이 그 후 한동안 저항을 계속하였다. 후에 이 부족은 포르투칼인들 을 피하여 내륙으로 도주하였다. 16세기말 영국 출신 탐험가가 이 들을 설복하여 다시 해안 지방으로 돌아와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도록 하였다. 이들은 전쟁 때문에 멸종 상태에 이르게 된다. 거 의 일만 명이 살해당했으며, 그 두 배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로잡혀 노예로 팔려갔다.
전반적으로 볼 때, 브라질에 있어서의 기독교 초기 역사는 당시 다른 곳의 식민지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밝은 것이 되지 못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야 이 때 나타난 각종 부작용들이 극복될 수 있었다.
교회의 분열과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 부패,철학적 회의주의 그리고 종교 문제에 침투하였던 민족적 이해관계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카톨릭 교회에 기존의 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업적은 가히 기록할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교 활동은 중요한 업적이었다. 이 활동들은 13세기와 뚜렷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때의 계획들이 후에 열매를 맺은 것들이었다. 이 시기의 또 다른 업적이라 한다면 플로렌스 회의를 통해 이루어진 일시적 교회의 통일이라 볼 수 있다. 교의로서 정립된 가장 중요한 교리는 성례에 관한 교리들이다. 성례 제도의 정립은 중세 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리의 업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성례의 숫자는 일곱으로 고정되었는데 이들 성례들은 그리스도 사역의 결과이며, 역사 속에서 그의 고난을 계속 지키고 이에 따른 혜택을 신자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이다.
중세는 그 시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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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6.03.11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9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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