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 머리말
II. 본말
1. 이규보의 생애
2. <東明王篇>
1) 作品 創作의 사회적 배경 및 계기
(1) 11~12世紀의 國內外的 상황 속에서 高麗人의 文化意識
(2) 고구려 傳統의 인식과 고려인의 領土意識
2) 東明王篇의 내용과 가치
3) 東明王篇의 創作動因에 對한 다양한 견해들
4) <東明王篇> 序文에 나타난 疑問點
III. 맺음말
II. 본말
1. 이규보의 생애
2. <東明王篇>
1) 作品 創作의 사회적 배경 및 계기
(1) 11~12世紀의 國內外的 상황 속에서 高麗人의 文化意識
(2) 고구려 傳統의 인식과 고려인의 領土意識
2) 東明王篇의 내용과 가치
3) 東明王篇의 創作動因에 對한 다양한 견해들
4) <東明王篇> 序文에 나타난 疑問點
III. 맺음말
본문내용
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양자택일적 사항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4) <東明王篇> 序文에 나타난 疑問點
<東明王篇>의 序文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다음의 구절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東明王의 신이(神異)한 일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미천한 남녀들까지도 제법 그에 관한 일들을 애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웃으며 “선사(先師) 공자님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아니하셨는데 이 동명왕 설화는 실로 황당하고 기궤(奇詭)하니 우리들의 논의할 바가 아닌 것이다.”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위서(魏書)><통전(通典)>을 읽어보니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하나 간략하고 상세치 않았으니, 이는 自國內의 일은 소상케 하고, 외국의 것은 줄인 뜻이 아니겠는가?
다음 계축년(癸丑年) 四월에 <舊三國史>를 얻어서 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事迹)이 세상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바보다 더 자세하였다.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그를 믿지 못하였으니, 귀환(鬼幻)스럽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 탐독(耽讀) 미독(味讀)하여 차차로 그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幻)이 아니요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위의 서문에서 드러나 있듯이 그는 ‘선사(先師)’의 가르침을 비교적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동명왕을 ‘황당기궤’한 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舊三國史』의 <東明王本紀>를 직접 보았을 때까지도 그것을 좀처럼 믿지 못하고 ‘幻’이나 ‘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동명왕설화를 ‘환(幻)이 아니요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라고 규정하고 실로 열렬하게 찬미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는 이와 같은 인식상의 돌연한 변화가 반복해 읽음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기는 하나, 그가 그토록 도외시하던 동명왕설화를 그토록 열렬히 찬미하게 된 태도의 변화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疑問點은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은 26세 때, 그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은거사로 지내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현실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의 문란한 정치상황과 민란 등의 혼란한 사회상으로 인해 힘든 생활을 하게 되자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송나라가 멸망에 가까워지고 금나라와, 요나라는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지만 문화적 수준이 매우 떨어져, 고려인이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자각과 문화적 선진국이라는 긍지를 갖게 되었던, 즉 국내외적인 상황변화에 따른 민족의 사회적 의식변화로 인해 동명왕을 새롭게 강조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인식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3. 맺음말
<東明王篇>은 고려 고종 때의 작품으로 고구려의 창국주인, 천제의 자손 주몽의 탄생과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을 내용으로 하며,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는 우월성과 자긍심을 갖게 해주고 있다. 이규보가 <東明王篇>을 창작한 1193년의 시기는 무신집권기로 온갖 부정부패가 자행되며 문학적 재능과는 무관하게 관직이 주어지는 사회였으며, 가혹한 수취로 인한 민중들의 황폐한 삶, 도처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민란 등으로 국가는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상 속에서 창작된 <東明王篇> 신라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고려왕조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 민란군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東明王篇>은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민족의 문화의 주체에 대한 각성에 의한 시대의식의 발현이며, 동명왕으로 상징되는 고구려적 전통사상과 북진정책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어져오던 영토의식, 즉 사회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참고문헌>
朴斗抱, 『東明王篇 帝王韻紀』李奎報 李承休 著
김건곤,여운필,김종진,이종문, 『고려시대 역사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어문연구실 編하현강,류탁일, 『李奎報의 現實志向的 文學世界 硏究 : 문학이론과 작품세계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이우성, 「高麗 詩人에 있어서의 文名意識의 形成」,『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하현강, 「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 『韓國의 歷史意識』상, 창작과 비평사
金鎭英 ; 車充煥, 『백운거사 이규보 시집 (白雲居士李奎報 詩集)』 李承休 著
申用浩, 『李奎報의 意識世界와 文學論硏究』
4) <東明王篇> 序文에 나타난 疑問點
<東明王篇>의 序文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다음의 구절을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東明王의 신이(神異)한 일이 이야기되고 있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미천한 남녀들까지도 제법 그에 관한 일들을 애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웃으며 “선사(先師) 공자님은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아니하셨는데 이 동명왕 설화는 실로 황당하고 기궤(奇詭)하니 우리들의 논의할 바가 아닌 것이다.” 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위서(魏書)><통전(通典)>을 읽어보니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하나 간략하고 상세치 않았으니, 이는 自國內의 일은 소상케 하고, 외국의 것은 줄인 뜻이 아니겠는가?
다음 계축년(癸丑年) 四월에 <舊三國史>를 얻어서 東明王本紀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事迹)이 세상에서 이야기되고 있던 바보다 더 자세하였다.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그를 믿지 못하였으니, 귀환(鬼幻)스럽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세 번 탐독(耽讀) 미독(味讀)하여 차차로 그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幻)이 아니요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었다.
위의 서문에서 드러나 있듯이 그는 ‘선사(先師)’의 가르침을 비교적 철저하게 신봉하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동명왕을 ‘황당기궤’한 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투철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舊三國史』의 <東明王本紀>를 직접 보았을 때까지도 그것을 좀처럼 믿지 못하고 ‘幻’이나 ‘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동명왕설화를 ‘환(幻)이 아니요 성(聖)이며, 귀(鬼)가 아니고 신(神)’이라고 규정하고 실로 열렬하게 찬미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그는 이와 같은 인식상의 돌연한 변화가 반복해 읽음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기는 하나, 그가 그토록 도외시하던 동명왕설화를 그토록 열렬히 찬미하게 된 태도의 변화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疑問點은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은 26세 때, 그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은거사로 지내던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현실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당시의 문란한 정치상황과 민란 등의 혼란한 사회상으로 인해 힘든 생활을 하게 되자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문화적 선진국이었던 송나라가 멸망에 가까워지고 금나라와, 요나라는 군사적으로는 강국이지만 문화적 수준이 매우 떨어져, 고려인이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자각과 문화적 선진국이라는 긍지를 갖게 되었던, 즉 국내외적인 상황변화에 따른 민족의 사회적 의식변화로 인해 동명왕을 새롭게 강조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인식함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3. 맺음말
<東明王篇>은 고려 고종 때의 작품으로 고구려의 창국주인, 천제의 자손 주몽의 탄생과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을 내용으로 하며,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과 다르다는 우월성과 자긍심을 갖게 해주고 있다. 이규보가 <東明王篇>을 창작한 1193년의 시기는 무신집권기로 온갖 부정부패가 자행되며 문학적 재능과는 무관하게 관직이 주어지는 사회였으며, 가혹한 수취로 인한 민중들의 황폐한 삶, 도처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민란 등으로 국가는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혼란상 속에서 창작된 <東明王篇> 신라부흥의 기치를 내걸고 고려왕조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한 민란군에 대항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뿐만아니라 <東明王篇>은 동아시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민족의 문화의 주체에 대한 각성에 의한 시대의식의 발현이며, 동명왕으로 상징되는 고구려적 전통사상과 북진정책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이어져오던 영토의식, 즉 사회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참고문헌>
朴斗抱, 『東明王篇 帝王韻紀』李奎報 李承休 著
김건곤,여운필,김종진,이종문, 『고려시대 역사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어문연구실 編하현강,류탁일, 『李奎報의 現實志向的 文學世界 硏究 : 문학이론과 작품세계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이우성, 「高麗 詩人에 있어서의 文名意識의 形成」,『韓國의 歷史像』, 창작과 비평사
하현강, 「高麗時代의 歷史繼承意識」, 『韓國의 歷史意識』상, 창작과 비평사
金鎭英 ; 車充煥, 『백운거사 이규보 시집 (白雲居士李奎報 詩集)』 李承休 著
申用浩, 『李奎報의 意識世界와 文學論硏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