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모른 채, 닮은꼴로 동시대를 살았던 동서양의 천재화가 - 장승업과 빈센트 반 고흐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서로를 모른 채, 닮은꼴로 동시대를 살았던 동서양의 천재화가 - 장승업과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장승업
1) 장승업의 생애
2) 장승업과 술&여자
3)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장승업의 작품 경향
4) 장승업의 업적

3. 고흐
1) 고흐의 생애
2) 고흐와 정신적 방황
3) 편지 속에 담긴 고흐의 가난&여자
4)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고흐의 작품 경향
5) 고흐의 업적

4. 장승업 VS 고흐
1) 열정, 그리고 방랑
2) 지인

5. 맺는 말

본문내용

서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꿈꾸는 고집스러운 모습과 동시에 어느 한 곳에 마음두지 못하는 방랑자의 외로움과 향수를 느낄 수 있다.
이유는 달랐지만, 그들은 일평생 한 곳에 정착해 살지 못했다. 끊임없는 방랑과 유랑이 계속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곳곳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고흐는 파리, 헤이그, 아를르, 생트 마리, 생레미 등에서 생활하며 그곳의 풍경을 그대로 담아냈다. 또한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교류한 화가들과 지인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그림의 성격이 조금씩 변하게 된다. 불행과 안정의 시기가 반복되고, 그는 회색빛 하늘과 우울한 거리, 때로는 농촌의 평화로운 풍경과 밝은 색채로 가득한 그림을 그려냈다. 또한 자신의 천직인 화가가 되기 전까지 그는 점원, 견습 교사, 선교사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거치면서 방황했다.
장승업의 생애는 술과 예술, 그리고 방랑으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의 명을 받드는 궁중 화사로서의 명성도, 그림의 대가로 받은 금전도, 가정 생활도 모두 그에게는 구속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술집과 그림을 부탁하는 사람들의 사랑방을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당시에 장승업의 그림을 구한 사람들은 위로는 왕과 고위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중인, 장사치, 부호 등 아주 많았다. 그러나 장승업의 그림을 구하려면 권위나 금전보다도 좋은 술과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했다. 장승업은 아름다운 여인이 따라주는 좋은 술을 실컷 마시고는 취흥이 도도한 가운데 기운 생동하는 명화들을 그려냈다.
「근원수필」에서 "오원이 평상시에 말하기를, 사람의 생사란 뜬구름과 같은 것이니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숨어버림이 좋을 것이요, 요란스럽게 앓는다, 죽는다, 장사를 지낸다 하여 떠들 필요가 무어냐고 했다"라는 이야기에서 그의 인생관을 알 수 있다.
2) 지인(知人)
고흐와 장승업이 어려운 생활과 자신을 옭아매는 고뇌 속에서도 꾸준히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도 애착을 가지고 변함 없이 그들의 옆을 지켜준 많은 지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들은 경제적인 지원 외에도 그들이 가진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그들이 그림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었고, 또한 가장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담자의 역할은 물론 적절한 시기에 날카로운 비판과 충고를 아끼지 않은 훌륭한 비평가이기도 했다.
고흐의 동생 테오는 고흐가 19세 되던 해부터 죽기 전까지 경제적인 도움은 물론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흐가 화가가 되겠노라고 밝혔을 때 힘을 불어넣어 주었고, 가족과 친지들마저 외면하는 고흐를 유일하게 따뜻이 감싸주었다. 때로는 좌절의 고통을 겪고 있는 고흐를 위로하고, 때로는 무절제한 생활을 하는 그에게 따끔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몇 번 사이가 틀어지기는 했으나, 테오는 고흐의 가장 큰 위안이자 삶의 활력이었다. 고흐가 죽고 나서 6개월 후 형의 뒤를 따름으로서 변하지 않는 우애를 보여주었다.
고흐의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예술의 동반자였던 고갱도 고흐의 빼놓을 수 없는 지인 중 한 사람이다. 1888년 10월 말 경, 고갱은 그의 호소에 응답을 해왔다. 고흐는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격렬한 토의 가운데서 이들 두 사람의 상극되는 성격 차이와 서로 다른 예술적 시각에 의해 두 사람의 사이는 나빠지고 말았다. 크리스마스 밤, 헛된 토론 중에 반 고흐는 고갱의 얼굴에 그의 거울을 던졌다. 다음날, 거리를 걷고 있었던 고갱은 등 뒤에서 급히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손에 면도칼을 들고 있는 고흐를 발견했다. 고갱이 계속 노려보는 가운데, 고흐는 집으로 도망을 가버렸다. 그리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냈다.
장승업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며 떠돌아다니다가 한양에 거주하던 역관 이응헌의 집에 붙어살게 되었다. 이응헌은 그림과 글씨를 모으고 감상하는 취미를 가졌던 인물로서, 장승업의 그림 재주를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활동하게끔 도와주었다고 한다. 고아였던 장승업이 이응헌 집안의 그림들을 통해 회화에 대한 숨은 재능을 발굴하게 되었고, 또 당시 통용되던 한문에 대해서도 초보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었다. 즉, 이응헌은 장승업이 화가로서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인물인 것이다.
이렇듯 이들 주변에 있던 수많은 지인들은 그들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고, 기행에 대한 사람들의 온갖 비난과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의 곁에서 변함 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있었기에, 고흐와 장승업은 자신의 예술세계를 꽃피울 수 있지 않았을까?
5. 맺는 말
흔히들 예술가의 삶은 고독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왜 고독한지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을 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반인과는 다른, 방랑적이고 고독한 길을 걸어간, 우리의 눈에는 비정상적이고 위태로워만 보이는 삶을 살아간 예술가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평탄치 않은 길을 가게 하였을까?
여기서 우리가 알아본 두 미술가 장승업과 고흐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방황했으며 외로워했고 끝내 그러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그들은 정신병을 앓거나 술과 여자로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과연 그들이 표면적으로 비춰지듯이 단순한 신경발작을 가진 정신병자이며 술과 여자를 좋아하는, 다만 예술적으로 좀 뛰어날 뿐인 그런 화가였을까?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결단코 아니다. 당시의 시대가 그들의 예술혼을 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았던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폭발적인 표현 욕구를 그들의 광기 어린 삶과 작품을 통해 표출해낸 것이다.
그들의 고뇌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만 그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추측할 뿐.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한, 나아가서는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창작 욕구와 천재적 발상과 씨름해야 했으며, 작품의 완성과 표현에 대한 완벽에의 열망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이것은 고흐의 《자화상》이나 장승업의 《청록산수도》 등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세상을 향해 분출하지 못한 것을 작품을 통하여 예술로 승화시킨 것은 아닐까?

키워드

추천자료

  • 가격2,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03.17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011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