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의 복식(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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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고대의 복식(패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Ⅰ.지중해 문명
1) 메소포타미아
(1) 수메르 패션의 기본
(2) 수메르의 액세서리
2. 바빌로니아 왕조
3. 앗시리아 왕조
4. 메디와(Media) 왕조와 페르시아(Persia) 제국
5. 이집트
(1) 기본적 스타일
(2) 액세서리와 장식품
(3) 미용술
6. 에게 문명

Ⅱ. 그리스․로마 시대
1. 그리스
2. 에트루리아(Etruia) 문명
3. 로마(Rome) 문명

본문내용

에 입고 허리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
(2) 미용술
이집트와 경쟁했던 그리스와 로마의 화장술은 이집트보다 훨씬 억압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이집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였다는 점도 이런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군국주의적인 그리스의 스파르타에서는 아예 화장품을 근절시키는 조치까지 취해졌다. 스파르타보다는 더 개방적이던 아테네에서는 그래도 조금 숨을 돌릴 여지는 있었다. 비록 결혼한 여성은 규방에만 갇혀 있었지만, 동양(여기서의 동양은 중동지역을 말한다)의 화장품이 꾸준히 그 규방으로 흘러들어 갔다. 밤에는 ‘남편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약간의 화장이 허용되기도 했다. 나중에 그리스 문명이 본격적으로 이집트 문명 등과 합쳐져 헬레니즘 문명을 꽃피우면서 화장술은 더 활발하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동양에서 유래한 짙은 화장이 유행하고 이른바 ‘백연 편집증’이라는 증후군이 지중해 일대를 휩쓸게 된다. 로마여성은 얼굴의 솜털을 왁스의 회반죽으로 없애고, 눈썹을 뚜렷하게 보이고자 눈썹 그리는 먹을 뿌렸다. 또한, 피부의 점을 감추기에는 작은 초생달 모양의 패치를 붙이기도 하였다. 로마의 귀부인들이 자신의 매력 추구에 얼마나 힘을 쏟았는가에 관해서는 풍자시인 쥬베나리스가 「여주인의 헤어스타일을 잘 정리하지 못하거나 컬을 실패한 노예는 손거울로 두들겨 맞고 심한 매질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지금 남아있는 로마의 조각상이 보여주는 미의 새로움은 노예 드레스에게 있어 잘못하면 목숨이 걸린 예술이었던 것이다.
얼굴을 백연, 석고, 백묵 등으로 진하게 화장하는 유행이 휩쓸더니 다시 그 얼굴에 푸코스 아르칸나, 밀토스 같은 식물성이나 광물성 재료로 붉게 액센트를 주는 방식이 히트를 쳤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리스 시대의 아름다움은 이집트보다 훨씬 억압적이었다. 나아가 아름다움을 조절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화장술보다는 운동이라는 의식이 강하게 유지됐다.
로마도 그리스적인 전통을 많이 답습했다. 그러나 제국이 풍요로워지면서 화장술도 점차 발달하게 된다. 가슴 팔 겨드랑이 다리 입술 뒤 코털 등을 본격적으로 제거하는 게 로마 귀족부인들의 기본적인 방식이었으며, 코르셋을 사용해 몸매를 감추기 시작한 것도 이 시대부터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을 안티몬이나 사프란으로 칠하고, 다시 볼을 아르칸나나 연단으로 붉게 칠하는 요란한 화장이 로마에서 유행했다. 로마의 최전성기를 지난 뒤부터는 오늘날 미국을 연상시키는 풍조가 나타난다. 비만에 대한 강박관념이 그것이다. 테렌티우스에 따르면 당시 여성들은 「운동선수처럼 보일까봐 두려워 음식의 양을 줄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로마인들은 감추기와 냄새 없애기에도 강박적으로 매달렸다. 이 시대에 이르면 대하수도의 오염이 심각한 상황으로 들어가고, 로마식 식생활의 폐해가 장기적으로 축적해 점차 노골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저마다 화장수와 향유를 발라 유해오염 물질이 몸에 접촉하는 것에 대비했으며, 피부병이나 구취·반점 등을 감추고 없애는 데 거의 신경질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게다가 백연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 얼굴빛이 변색되고 치아가 검어지고 신경이 둔화되는 증상까지 확산됐다. 제국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3) 장신구
로마의 상류명사들에게 있어 신발은 패션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헤리오가바르스 황제는 다이아몬드의 보석으로 장식한 신발을 신었고 당시의 색다른 장식 취미를 가진 율리어스 시저는 빨간색의 하이힐을 신어 보수적인 원로원 의원들을 몹시 화나게 했다고 한다. 어린애도 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원로원에 대해 시저는 「나는 고대 전설에 있는 새벽의 신 아르바의 자손이다. 이 하이힐이야말로 고대 왕의 전통적 패션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로마인의 부와 신분을 과시한 것은 역시 보석이었다. 검소하고 금욕적이었던 초기 공화정 시대에는 죽은 사람과 함게 매장하는 금제품을 제한하기 위한 각종 법령이 선포되었다. 거대한 영토에 비해 로마는 금의 보유량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390년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당시 로마의 금 보유량은 100파운드였다고 한다.
처음 공화정 로마의 유품의 보석류는 대개 모두 그리스문명이나 에트루리아 문명의 유산이었으나 제정시대에는 동방의 호화찬란한 보석들이 대거
들어오게 되었다. 최신 유행을 경연하는 사치와 허영의 도시에서는 보석공예의 드라마틱한 부활이 있었다. 처음은 역시 그리스, 에트루리아의 보석, 조금 기술을 계속 이어받은 기술이었지만 로마의 조금가들이 창작한 새로운 보석기술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테르라실' 기법이 그것으로, 금판을 조각한 뇌문무늬 세공이다. 또 하나의 신기법은 착색 보석을 무제한으로 사용한 것이다.
로마인이 보석 중에서 가장 사랑한 것은 반지였다. 공화정 법률을 지키면 허용된 가장 적은 보석세공으로 반지가 가장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허용된 가장 적은 보석 세공이라고는 반지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약혼할 때 반지를 보내는 풍습은 로마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구약성서》 룻기 제4장에 보면 물건을 살 약속을 하거나 권리를 양도할 때 장갑이나 신을 넘겨주는 풍습이 적혀 있는데 이것이 그 관습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로마인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 <1세기>를 보면, 그 무렵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철제 반지를 사용하였는데, 2세기 무렵에는 황금제 반지를 사용하였다. 반지를 받은 여성은 남성에게 카메오라고 하여 조개껍데기나 마노(瑪瑙)로 자신의 초상을 조각한 반지를 만들어 보냈다고 한다. 그리스도 교에서는 이 풍습을 이교적(異敎的)이라 하여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9∼10세기경부터 교회가 이것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에서는 교회에서 치르는 결혼을 중시하였으므로 새로이 결혼반지라는 풍습이 탄생하였다.
【참고 문헌】
그룸바크, 디디에《패션의 역사》窓, 1994
부쉐, 프랑소와《그림으로 보는 서양복식사》경춘사, 1992
정흥숙 《서양복식문화사》敎文社, 1997
조진애 《서양복식의 역사》, 경춘사, 2002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한길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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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11
  • 저작시기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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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4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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