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부곡제의 성립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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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고려의 군현체계와 부곡제
1. 군현체계의 성격과 내부구조
2. 군현제 영역의 성립
3. 부곡제의 성립
① 성립시기 ② 성립배경 ③ 신라시대의 鄕과 部曲

Ⅲ. 부곡제의 변질
1. 변질의 계기
① 군현체계의 변질
② 수취체제의 변질
2. 변질의 방향
① 郡縣化 현상 ② 來屬化 현상 ③ 直村化 현상

Ⅳ. 결론

본문내용

행정적인 측면을 고려치 않고 정치적인 이유로 이들을 바로 군현으로 승격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부곡제의 규모문제와 연결된다. 향, 부곡, 소, 처, 장은 각각의 단일 집단만으로는 하나의 군이나 현을 이룰수 없을 정도의 소규모였음을 시사하여 준다.
고려시대 부곡집단이 군현으로 승격되어 이후 군현의 勢를 계속 유지한 것은 대체로 몇 개의 부곡집단이 합쳐져 군이나 현으로 되는 경우였다. 한편 부곡인 출신들이 고려왕조에 특별한 공로를 세운 대가로 부곡제 가운데 1개의 단일집단이 군현으로 승격되었던 경우, 대부분 조선전기에 이르러 이들 군현은 그 기능을 상실하여 폐현이 되는 예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군현 편성시 행정적인 면을 고려치 않고 정치적 이유로 군현이 승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고려정부는 12세기 이후 부곡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부곡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는 조치보다는 이들 집단을 기존 군현의 일부르 흡수하는 보다 더 일반적인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② 來屬化 현상
내속화현상은 중앙정부가 부곡집단을 군이나 현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군현재편시 인구와 토지 등을 감안하여 주변의 다른 군현에 흡수시켜 해당 군현의 촌락으로 삼는 조치이다. 이 경우 내속은 지배의 차원에서 해당 부곡집단을 원래 소속되었던 군현에서 다른 군현으로 이속시키는 것을 말한다.
군현화 현상이 군현편성 과정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로 이루어졌던 것에 비하여, 부곡제 집단에 대한 내속화 조치는 군현의 실정을 감안하는 행정적인 편성의 성격이 짙다. 이러한 조치는 행정적인 차원에서 부곡집단을 고려시대 이래 원래 소속되었던 군현에서 떼어 내어 다른 군현에 이속시키는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부곡제가 군현으로 승격된 사례 가운데 폐현이 된 것 역시 결과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내속화 현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 부곡제의 변질 방향을 알려 주는 90여 개 사례 가운데 대부분의 사례는 이와 같이 내속화되는 형태였다.
③ 直村化 현상
지금까지 부곡집단의 변동 양상에 관한 사례들을 검토한 결과, 부곡집단은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원래 소속된 군현에서 다른 군현으로 이속되면서 해당 군현의 일부를 이루는 방식으로 변동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 사례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군현제 개편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기 때문에 지리지 작성과정에서 대부분 누락되지 않은 채 오늘날까지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체 900여 부곡집단이 존재하였던 점을 고려하면 위의 사례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부곡집단은 현재의 기록에 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변동된 것으로 판단된다.
ㄱ. 部曲-坤義 今亡爲直村(《世地》固城縣條)
ㄴ. 豆也只(部曲) 今廢爲慶山縣直村(《慶地》慶山縣條)
ㄷ. 部曲-船南 今廢爲村(위 책, 星州牧條)
ㄹ. 所屬部曲-蘆谷 今廢爲村(위 책, 八縣條)
ㅁ. 部曲-正骨 舊屬坤明 今亡爲直村(《世地》宜寧縣條)
ㅂ. 鄕-砥山 舊屬坤明 今亡爲直村(위와 같음)
ㄱ~ㅂ의 사례들은 해당 향 부곡집단이 원래 소속된 군현에 그대로 묶여 있으면서 조선시대에 해당 군현의 직촌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사실은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소속의 변동에 의해 타 군현에 이속 되지 않은 대부분의 부곡집단은 이와 같이 원래 소속된 군현의 직할촌으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Ⅳ. 결론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부곡제 연구의 주류적 경향은 이른바 부곡인=천인론과 양인론으로 대변되는 부곡제 구성원의 신분적 실체를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양천 양론이 전개된 양상을 검토하여 보면, 주목되는 것은 양론자들이 부곡제 구성원의 신분적 실체를 해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부곡제의 발생 기원, 부곡제의 발전단계나 해당시기 부곡제의 구조적 특성에까지 연구의 범위를 확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가운데 부곡제의 발생 기원문제에 대한 해명은 부곡제 구성원의 신분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의 부곡제 연구의 근본적인 과제로서 부각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듯이 군현제는 국가가 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관철하는 주요한 제도장치였다. 고려 이전과 고려의 부곡제가 모두 군현제 편성과정에서 성립되었던 사실은 양시기의 부곡제가 내용적으로 상호 동질적인 측면을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하여 줄 뿐 아니라, 나아가 한국사의 부곡제가 중국이나 일본의 부곡이 私賤民이었던 것과는 달리 국가적 지배질서 속에 편입되어 있는 공적인 영역내의 존재라는 고유한 자기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한편 고려의 부곡제가 국가적인 수취체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국가에 대한 특정의 역을 부담하는 곳이었다는 사실이나, 登神莊條에서 신라시대 군현제와 부곡제가 토지와 호구를 고려한 위에서 편성되었다는 사실 역시 한국사에서 부곡제의 역사적인 특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내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 이후 대규모의 감무파견은 광대한 임내로 구성된 군현체제를 점차 축소시켜 갔으며, 특히 그러한 변화는 종전의 군현체제하의 본관제중심의 수취방식에서 공호의 편성에 의한 現住地 중심의 수취 방식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취방식의 전환은 고려정부가 속현과 부곡 등 임내를 직접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울러 고려전기 군현제와 부곡제 영역을 기축으로 각 영역에 대한 개별적인 수취를 지양하고 이후 군현제적 수취방식으로 단일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감무의 파견과 공호의 편성이 시기적으로 12세기 초인 예종대에 비로소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군현체제하 부곡제 역시 이 무렵을 계기로 군현화, 내속화, 직촌화 하면서 사실상 변질되는 추세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15세기에 이르면 한국사에서 완전히 소멸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한국중세사학회, 『고려시대사강의』, 도서출판 늘함께, 1997
朴宗基 , 『고려시대 부곡제연구』, 서울대 출판부, 1991
강만길 외, 『한국사-7』, 한길사, 1995
구산우, 『고려시기 부곡제의 연구성과와 과제』, 부산대학교 사학회, 1988
구산우, 『고려전기 향촌지배체제 연구의 현황과 방향』, 부산대학교 사학회, 1999
박은경, 「高麗時代 鄕村社會硏究」 , 일조각,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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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5
  • 저작시기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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