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작품 연구
1. 모죽지랑가 해독
2. 향가해석상의 쟁점
3. 배경설화 : 「삼국유사」권2 효소왕대 죽지랑
Ⅲ. 창작시기
1. 창작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시적 문맥
2. ‘初’의 의미와 관련 설화
3. 창작시기에 따른 작품 성격
Ⅳ. 인물 연구 및 사회상
1. 인물 연구
2. 죽지랑이 당한 수모를 통해 살펴본 사회상
3. 삼국유사 수록 요인
Ⅴ.결론
Ⅱ. 작품 연구
1. 모죽지랑가 해독
2. 향가해석상의 쟁점
3. 배경설화 : 「삼국유사」권2 효소왕대 죽지랑
Ⅲ. 창작시기
1. 창작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시적 문맥
2. ‘初’의 의미와 관련 설화
3. 창작시기에 따른 작품 성격
Ⅳ. 인물 연구 및 사회상
1. 인물 연구
2. 죽지랑이 당한 수모를 통해 살펴본 사회상
3. 삼국유사 수록 요인
Ⅴ.결론
본문내용
하고자 하는 데에 큰 의의가 있었다면 통삼 이후 이미 그 활용가치가 감소된 그들 일족의 세력이란 오히려 전제주의적 체제를 다지려는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무엇보다도 화랑단에 대한 국가적인 인식의 급격한 감소다. 통삼 이후 화랑단은 점차 문닉에 빠진 사치, 선유, 허영적 단체로 변질되었다. 화랑단의 성격이 이처럼 변모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물론 시대의 변천에 따르는 자체 내의 쇠퇴도 있었겠지만, 또 하나는 화랑단에 대한 국가나 사회의 평가기준이나 인식의 도가 전과는 현저하게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국가로부터의 의식적인 평가절하 내지는 도태의 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는 데에도 그 동인의 일단이 있었을 줄로 믿는다.
위의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나타난 사건의 내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통삼 이후 무관들의 세력이 중앙정부로부터 거세됨에 따라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익선은 노비관리관 또는 역역조달관 등과 같은 문관 계통의 관리였다. 설사 그의 직위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치더라도 이미 사양길에 들어선 무관들의 처지보다는 우월한 입장을 지킬 수 있는 자리였다고 본다. 결국 익선이 득오를 임의로 끌어가고 또 득오를 구출하러 간 죽지를 묵살하게 된 사회적 동기는 문관 위주의 시대적인 환경이 익선으로 하여금 아무 거리낌 없이 방자스런 행동을 자행토록 하였다고 판단된다. 둘째, 전왕대인 신문왕 원년에 일어났던 왕실에 대한 김금돌의 모역사건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김금돌이 모반함에 따라서 그 여파가 죽지랑 등에까지 파급되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의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익선마저 넘보는 대상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셋째, 죽지랑이 내물계의 인물이었다는 점도 일단 문제가 된다. 그를 비롯한 김유신계나 김금돌 등은 무열왕계의 치하에서는 도저히 권세의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신분들이었다. 전제체제를 굳히려는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계층에 해당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죽지랑에 가한 익선의 오만불손한 행위에 대해 후에 중앙정부가 모량리 사람들 전체에까지 파급시켜 응징을 가한 사실을 두고 화랑에 대한 국가적인 우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평소 모량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차별 대우 등을 참작할 때 삼국유사 원문에서 볼 수 있는 조정의 사후처리는 죽지랑 사건을 빙자하여 모량부 세력을 상대로 감정적이고도 고의적인 것으로 판단될 뿐 죽지랑 개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그러한 처리를 단행한 것만은 아니라고 헤아려진다. 왕년의 중신에 대한 극히 의례적인 대접에 지나지 않는, 그리고 비록 실세되었으나 잔존해 있는 화랑단의,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예방하기 위한 무마적인 처리로밖에 판단되지 않는다.
3. 삼국유사 수록 요인
「삼국유사」는 일연이 불교의 경험담들을 주로 채록하여 불교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죽지랑조의 가사는 미륵환생담이 후반부에 조금 비칠 뿐 거의가 죽지의 미사(美事)에 관련한 비불교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를 일연이 삼국유사에 채록하게 된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일연이 태어나서 입적하기까지의 시기는 고려가 최씨 정권의 전성기로부터 몽고침입에 의한 강화천도 및 몽고군에의 굴복·삼별초의 항전란 등 민족적으로 어지럽고 쓰라린 수난의 시기에 해당한다. 민족의 수난시기에 생존하였던 일연으로서는 외세의 압제에 대한 민족적인 저항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당시 몇 지식인들의 민족적 각성으로 민족 서사시가 창작됨에 따라 전통문화를 수호하면서 구전되던 삼국의 설화들을 모아 그의 입장에서 「삼국유사」를 엮었던 것이다.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한 상당기간 고려의 사상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불교유적은 대거 파괴되었다. 파괴되는 문명을 몽고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부 지식층은 신라시대로 눈을 돌려 신라를 정통으로 한 신라정신을 발굴하기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신라정신은 신라적 불교와 화랑도 정신으로 집약된다. 그래서 일연도 문명을 지키며 민족적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전승적 사료들을 모아 「삼국유사」를 엮었으리라 추측된다.
죽지랑도 진골 출신으로 부친이 높은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세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부하를 사랑하는 정신을 보여 그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었다. 일연도 이 죽지의 위와 같은 미사(美事)에 관한 일화를 접하게 되자 감동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에 큰 공훈을 세운 천존(天存) 등의 설화는 제쳐놓고 죽지랑 설화를 채록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Ⅴ.결론
우리는 이상과 같이 모죽지랑가의 작품연구, 창작시기, 인물 연구 및 사회상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모죽지랑가〉는 그 창작시기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아 이에 따른 여러 학자와 여러 가지 설이 상당히 분분하였다. 그 중 우리는 양주동 선생님의 해독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였고, 득오가 죽지랑이 생존해 있을 때 지은 노래라는 견해와 죽지랑이 죽은 뒤 그를 추모하며 지은 노래라는 견해 중 전자를 택해 작품의 성격을 '사모시'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김무헌,『향가여요교육론』, 집문당, 1997.
양희철,『삼국유사향가연구』, 태학사, 1997.
김완진,『향가 해독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김진욱,『향가문학론』, 역락, 2005.
신재홍,『향가의 해석』, 집문당, 2005.
화경고전문학연구회, 『향가 문학 연구』, 일지사, 1993.
임기중,『새로 읽는 향가문학』,아세아문화사, 1998.
김완진,『향가와 고려가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정렬모,『향가연구』, 한국문화사, 1999.
홍기삼,『향가설화문학』, 민음사, 1997.
박노준,「모죽지랑가」, 국어국문학회편,『향가연구』, 태학사, 1998.
황패강,『향가 문학의 이론과 해석』, 일지사, 2001.
장진호, 『신라향가의 연구』, 형설출판사, 1994.
위의 시대적 상황을 바탕으로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나타난 사건의 내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통삼 이후 무관들의 세력이 중앙정부로부터 거세됨에 따라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익선은 노비관리관 또는 역역조달관 등과 같은 문관 계통의 관리였다. 설사 그의 직위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치더라도 이미 사양길에 들어선 무관들의 처지보다는 우월한 입장을 지킬 수 있는 자리였다고 본다. 결국 익선이 득오를 임의로 끌어가고 또 득오를 구출하러 간 죽지를 묵살하게 된 사회적 동기는 문관 위주의 시대적인 환경이 익선으로 하여금 아무 거리낌 없이 방자스런 행동을 자행토록 하였다고 판단된다. 둘째, 전왕대인 신문왕 원년에 일어났던 왕실에 대한 김금돌의 모역사건이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즉 김금돌이 모반함에 따라서 그 여파가 죽지랑 등에까지 파급되어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거의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익선마저 넘보는 대상이 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셋째, 죽지랑이 내물계의 인물이었다는 점도 일단 문제가 된다. 그를 비롯한 김유신계나 김금돌 등은 무열왕계의 치하에서는 도저히 권세의 자리에 머물 수 없는 신분들이었다. 전제체제를 굳히려는 왕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계층에 해당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죽지랑에 가한 익선의 오만불손한 행위에 대해 후에 중앙정부가 모량리 사람들 전체에까지 파급시켜 응징을 가한 사실을 두고 화랑에 대한 국가적인 우대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 평소 모량부에 대한 중앙정부의 차별 대우 등을 참작할 때 삼국유사 원문에서 볼 수 있는 조정의 사후처리는 죽지랑 사건을 빙자하여 모량부 세력을 상대로 감정적이고도 고의적인 것으로 판단될 뿐 죽지랑 개인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그러한 처리를 단행한 것만은 아니라고 헤아려진다. 왕년의 중신에 대한 극히 의례적인 대접에 지나지 않는, 그리고 비록 실세되었으나 잔존해 있는 화랑단의, 있을지도 모를 반란을 예방하기 위한 무마적인 처리로밖에 판단되지 않는다.
3. 삼국유사 수록 요인
「삼국유사」는 일연이 불교의 경험담들을 주로 채록하여 불교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죽지랑조의 가사는 미륵환생담이 후반부에 조금 비칠 뿐 거의가 죽지의 미사(美事)에 관련한 비불교적인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를 일연이 삼국유사에 채록하게 된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일연이 태어나서 입적하기까지의 시기는 고려가 최씨 정권의 전성기로부터 몽고침입에 의한 강화천도 및 몽고군에의 굴복·삼별초의 항전란 등 민족적으로 어지럽고 쓰라린 수난의 시기에 해당한다. 민족의 수난시기에 생존하였던 일연으로서는 외세의 압제에 대한 민족적인 저항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당시 몇 지식인들의 민족적 각성으로 민족 서사시가 창작됨에 따라 전통문화를 수호하면서 구전되던 삼국의 설화들을 모아 그의 입장에서 「삼국유사」를 엮었던 것이다.
몽고군이 고려에 침입한 상당기간 고려의 사상 전반을 지배하고 있던 불교유적은 대거 파괴되었다. 파괴되는 문명을 몽고군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부 지식층은 신라시대로 눈을 돌려 신라를 정통으로 한 신라정신을 발굴하기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신라정신은 신라적 불교와 화랑도 정신으로 집약된다. 그래서 일연도 문명을 지키며 민족적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 전승적 사료들을 모아 「삼국유사」를 엮었으리라 추측된다.
죽지랑도 진골 출신으로 부친이 높은 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세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으며 부하를 사랑하는 정신을 보여 그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었다. 일연도 이 죽지의 위와 같은 미사(美事)에 관한 일화를 접하게 되자 감동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에 큰 공훈을 세운 천존(天存) 등의 설화는 제쳐놓고 죽지랑 설화를 채록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Ⅴ.결론
우리는 이상과 같이 모죽지랑가의 작품연구, 창작시기, 인물 연구 및 사회상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모죽지랑가〉는 그 창작시기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아 이에 따른 여러 학자와 여러 가지 설이 상당히 분분하였다. 그 중 우리는 양주동 선생님의 해독에 따라 작품을 이해하였고, 득오가 죽지랑이 생존해 있을 때 지은 노래라는 견해와 죽지랑이 죽은 뒤 그를 추모하며 지은 노래라는 견해 중 전자를 택해 작품의 성격을 '사모시'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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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진,『향가 해독법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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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고전문학연구회, 『향가 문학 연구』, 일지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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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진,『향가와 고려가요』,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정렬모,『향가연구』, 한국문화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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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준,「모죽지랑가」, 국어국문학회편,『향가연구』, 태학사, 1998.
황패강,『향가 문학의 이론과 해석』, 일지사, 2001.
장진호, 『신라향가의 연구』, 형설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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