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과연 전범인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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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히틀러는 과연 전범인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인물인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히틀러의 사상적 배경

3.히틀러의 성격

4.유태인 탄압

5.나찌스의 종교와 문화

6.히틀러의 정권획득

7.대외정치적 측면의 히틀러

8.결론

9.참고문헌

본문내용

폴란드를 침공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부의 작전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1940년 5월 대프랑스전에서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1941년 히틀러가 보수파와 군수뇌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소련과의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히틀러는 특히 1942년말 독일 제6군단이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에서 포위당했을 때 독일군의 후퇴를 금지시킴으로써 22만여 명의 독일군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게 했다.
히틀러의 점령정책은 매우 가혹했으며, 포로와 점령지 주민, 그리고 유대인을 강제노동에 동원하거나 강제수용소로 이송·살해했다(→ 전쟁범죄). 또한 독일군은 점령지에서 물자를 무자비하게 탈취했고, 슬라브 민족에게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반(反)나치 저항운동이 전유럽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나 독일 내에서 히틀러의 이민족 억압 및 착취 정책에 대한 비난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독일의 주요지배계급은 전쟁 말기까지 히틀러의 전쟁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더욱이 1944년 7월 20일 히틀러의 암살을 기도한 반란조직에 가담했던 많은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와 종교인을 제외하고는 히틀러보다 더 반동적이어서 구체제로의 복귀를 희망했다(→ 7월암살음모사건). 즉 독일에서 히틀러 반대세력은 나치가 멸망하는 날까지 극히 적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동지로서 존경했으며,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내부의 친독일파였으므로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외교면에서 이탈리아와 독일은 스페인 내란 이후 상호 협력했으나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패배를 거듭하자 실망한 히틀러는 중요한 정책을 무솔리니와 의논하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국가적 이해는 존중했지만 이탈리아와의 동맹관계를 부담스럽게 생각했고, 독일의 패배 또한 대부분 무솔리니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모든 타협을 배척하고 최후까지 전쟁을 수행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총통 관저 지하에서 음독자살했다(권총자살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최근의 소련 자료에 의해 음독자살로 판명되었음). 그의 시체는 소련군에게 발견되었으나 독일 측에 반환되지 않았다.
2) 2차 세계대전의 전범 히틀러
1939년 8월 독일은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비밀리에 성사시킨다. 히틀러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진행하려고 했던 전쟁을 동쪽에서 외교적으로 보장받음으로써 지체없이 실행했다. “나는 이제 독일 제국의 첫 군인에 지나지 않기를 원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나에게 가장 성스럽고 가장 값비쌌던 그 제복을 다시 입을 것이다. 나는 그 옷을 반드시 승리한 후에 벗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종말을 더 이상 살아서 체험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항복이라는 단어를 결코 알지 못한다. 1918년 11월(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은 독일 역사에서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의 폴란드 진군이 시작되었다. 영국이 신속하게 이에 대응하였다. 히틀러와 군부는 영국의 선전포고에 당황하였다. 독일은 대영제국의 무진장한 예비군과 미국에 대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잠깐 동안의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1차대전 때 4년 동안 엄청난 피의 희생을 치르고도 성공하지 못했던 프랑스 파리로의 진군을 상병 출신의 히틀러는 그 당시 6주만에 이루어 내었다. 프랑스에 이어 네덜란드,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이 단 몇 주만에 항복했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시작 단계에 나쁜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회의는 이제 사라지고 과장된 현실이 목격되었다.
영국을 제외한 서방 세계의 항복을 받아 낸 히틀러는 다음 계획을 실행했다. “내 인생의 성스러운 사명을 위한 진정한 투쟁에서 몸과 마음을 바쳐 생의 목표인 민족사회주의의 실현과 볼셰비키를 박멸하기 위해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쪽으로, 유일하게 남은 동쪽으로 우리의 생명선이 확장되어야만 한다.” 스탈린과의 불가침 조약을 무시하고 러시아 공격에 대한 계획이 강행되었다. ‘그때까지 세계에 일어났던 것’ 중에서 가장 거대한 300만 명이 동원된 ‘바르바로사’라는 작전의 진군이 시작되었다. 소련 측의 방어 계획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1941년 5월 15일에 러시아 공격을 감행한다는 일정표는 지켜질 수 없었다. 그 이전에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전투에 이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를 도와주어야만 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도와주었던 무솔리니에게 약속한 것을 지켰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실로 엄청났다. 무솔리니로 인해 한 달 이상 지연된 작전은 실패를 잉태하고 있었다. 월동 준비를 갖추지 않은 독일 군대에 기습적으로 닥친 러시아의 초겨울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이래로 완만하지만 끊임없는 퇴각이 시작되었다.
8.결론
히틀러는 위에서 보듯이 전체주의, 인종주의, 게르만민족우월주의, 반유태주의, 반마르크스주의로 이루어진 나치즘을 토대로 많은 유태인을 탄압하고 학살 했으며, 2차 세계대전을 획책했다. 물론 이것이 전부다 히틀러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히틀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히틀러가 그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1차 세계대전이후에 독일의 국민들이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고, 이러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 방책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계획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전쟁에서 패배 하였기에 역사에 남을 전범이자, 독재자, 파괴자로 남는 것이지 이겼다면 그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이다. 즉 역사에서 패자이기에 히틀러가 안 좋은 평가를 받는 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히틀러가 했던 행위들은 결코 용서 받지 못하는 것이다. 히틀러가 행했던 많은 일들.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고,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것등 이런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히틀러는 용서받지 못할 짓을 한 전범일 뿐이다.
9.참고문헌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Weiss, Peter, 한국문화사, 2003
나의 투쟁, Hitler, Adolf, 홍신문화사, 1993
히틀러 평전 1 - 2, 페스트, 요하힘 C. 푸른숲,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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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04.27
  • 저작시기2005.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6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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