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홍이섭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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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자 홍이섭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생애

2. 역사학의 형성배경

3. 사관과 역사인식

4. 주요저작

5. 그의 역사학의 성격

본문내용

성격은 농촌운동의 선구이고, 강한 현실비판의식을 지닌 부친과 평등의식이 강조되어 있는 개신교정신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던 것을 보인다. 그리고 1946년에 간행된 『세계사(世界史)와 대조(對照)한 조선사도해표(朝鮮史圖解表)』의 저술의도에 나타나 있듯이, 홍이섭은 한국사를 세계사와의 비교를 통해 좀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인식하려 하였다. 이같은 의식은 연희전문학교 시절 백낙준으로부터 배운 서양사·교회사에 관한 지식과 세계주의를 강조하는 개신교정신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족사학 전통을 계승하여 일생 동안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올바른 주체적 민족사관을 확립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일본사학의 영향을 받은 문헌고증사학에 저항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제에 굴절되지 않은 서구의 진보적 역사의식을 수용, 자신의 역사인식 방법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역사학에서 적극적인 실천적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민족문화추진위원회 이사, 외솔회 회장, 서울기독교청년회 이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상임이사 등을 역임하여 관공서나 사회 각계의 편집회·강연회 및 언론매체를 통해 민족사학을 보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같은 민족역사의 확대·보편화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은 그의 견해와 주장이 새롭고 신념에 차 있으며 설득력이 있었기에, 역사학계는 물론 각계 각층의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홍이섭의 역사인식 방법에서는, 정치사 중심으로 실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복원하는 데 치중했던 근대역사학의 단계를 극복하고, 연구영역을 경제사, 사상사, 문학적 역사 등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현대역사학을 지향하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로써 민족사학 전통을 이어받아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사관의 확립을 끈기있게 추구한 홍이섭의 역사학이 한국사학 발전 내지 사학사에 점하는 위치는 더욱 높게 평가된다 할 것이다.
★참고★
『조선과학사』
1) 한국과학에 대한 연구
한국 과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다른 분야보다 아주 늦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회 한국의 과학 전통을 한국 문화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더욱 근래의 일이다. 역사학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되면서 비로소 과학사가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하고, 한국의 과학전통이 연구의 대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 과학사를 처음으로 연구해 발표한 학자로는 홍이섭(洪以燮. 1914-1974)을 들 수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이후 대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과학사와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남겼다. 1944년 동경에서 일본어로 처음 출판된 『조선과학사』(朝鮮科學史)는 해방 직후인 1946년 한글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원래 잡지 『조광』(朝光)에 연재되었던 것을 책으로 정리해 낸 것이다. 한국의 과학사를 전시대에 걸쳐 종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에서 홍이섭의 가장 대표적 공적으로 꼽혀오고 있다. 한국 과학기술사를 시대(왕조)별로 나눈 다음 각 왕조에서의 제도, 천문역법, 지리, 의약, 수학과 건축, 농업, 야금과 도자기, 직조와 염색, 교통 등의 각 분야에 걸쳐 주로 옛 기록들을 조사·정리하였다. 또 실학시기 이래의 서양과학의 수용을 설명해 놓았다. 과학사 전문가라고는 한 명도 없던 때에 홍이섭은 한국사를 전공하면서 과학기술사에 관한 자료를 모아 한국과학사 연구의 훌륭한 기초를 마련한 셈이다. 1994년 『홍이섭전집』의 첫 부분으로 다시 출간될 정도로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2) 첨성대
·첨성대에 관한 최초의 기록 『삼국유사』
『고려사』, 『세종실록』(모양, 높이, 둘레 등 설명)에서 보다 자세한 기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 관측 기사.
『서운관지(書雲觀志)』, 『문헌비고(文獻備考』 천문대로서의 첨성대 역할 기록.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 일본인 "와다(和田)
·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 대였으리라는 견해"
·홍이섭(洪以燮) 『조선과학사』에서 첨성대를 천문대로 평가.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라 평.
<참고문헌>
한국인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 비평사, 1994
홍이섭의 삶과 역사학, 혜안출판, 1995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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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6.04.27
  • 저작시기2005.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6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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