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발전했던 실학에 대한 설명 및 관련학파와 대표학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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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발전했던 실학에 대한 설명 및 관련학파와 대표학자 소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실학사상

█ 실학 형성의 배경과 요인

█ 실학의 전개

█ 실학의 형성과 발전
▉ 실학사상의 특징
▉ 실학사상의 발생요인
▉ 실학자들의 관심분야
▉ 실학의 흐름
▉ 경세치용학파 (중농학파)
▉ 이용후생학파 (중상학파)
▉실사구시학파

본문내용

었다. 그는 베이징 기행문인 〈연기 燕記〉의 시사(市肆)·음식·가옥·기용(器用)·병기·악기·축물(畜物) 등 여러 항목에서 중국에서 본 바를 조선의 문물과 비교하면서 그 실익을 취하도록 서술하고 있다. 그는 화이(華夷)의 구분은 지역상의 구분일 뿐 중국은 어디까지나 외국이요 조선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시대풍조인 숭명반청(崇明反淸) 사상을 지양하고 '학중국'(學中國)하여 경제생활의 개선 등을 도모하자는 북학론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허에 대립하는 실의 학문으로서 실학을 자신의 학문적 중심으로 세워나갔으며, 실을 찾는 새로운 연구영역을 개척해갔다. 경세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천문·율력·산수 등 자연과학의 영역에까지 연구가 확대된 것은 이러한 학문활동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북학파의 선구자로 지구(地球)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였고, 균전제, 부병제를 토대로 하는 경제정책의 개혁,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 등용, 신분의 차이 없이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에게 교육시켜야 한다는 혁신적인 개혁사상을 제창하였다. 즉,
그의 학문과 사상의 주관심사는 유교적인 원리론 보다는 군국(軍國)과 경제에 대한 것이었다. 봉건적 신분제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놀고먹는 자는 신분의 여하를 막론하고 형벌을 주며, 재주와 학식이 있는 자는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중직에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어떤 신분이라도 교육의 기회를 주고 과거제 대신 공거제(貢擧制)를 실시하여 능력 있는 자를 중용하며 공적인 발언권을 허용할 것 등을 주장했다. 토지제도에 대해서는 균전법(均田法)에 따라 전국 토지를 기혼 남자에게 각 2결(結)씩 분배할 것을 주장했으며 상마(桑麻)의 재배를 권장하고 저축을 강조했다. 관제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관아는 혁파하고 폐할 수 없는 관아는 모두 왕 직속의 경(卿)에게 소속시켜 명령계통을 확립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내수사(內需司)와 관결(官結)을 폐하여 호조에 소속시켜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을 일원화할 것을 주장했다. 병제에 대해서는 100만 명의 병력 보유와 각 지역의 성곽의 정비, 무비(武備)의 철저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혁을 통해 균전제·부병제(府兵制)를 실시하여 농민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국가재정의 기반인 세원과 국방의 기반인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당시 천문학·수학·의학 등 자연과학은 신분상 특수 계층이 담당하는 낮은 학문으로 취급되고 있었는데, 그는 과학기술을 '정신의 극치'라고 보아 중시했다. 자연과학 가운데서도 특히 천문학에 관심을 기울여 베이징에 갔을 때도 흠천감의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을 만나 많은 질문을 하고 천문시설 등을 자세히 관찰했다. 천문학과 관련된 그의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지전설이다. 그는 지구의 둘레는 9만리, 하루는 12시간이고 하루 동안 지구가 1번 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전설은 독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온 서양학설에서 시사받은 것이었다. 그가 베이징에 갔던 무렵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太陽中心說)은 중국에 비교적 널리 소개되어 있었다. 당시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은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와 이익(李翼)·김만중(金萬重) 등이 언급했고, 지전설은 17세기에 이민철(李敏哲)·김석문(金錫文) 등이 말했으나 그의 지전설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에 시사받으면서도 그것을 사고하고 체계화시키는 데 동양적 논리를 전개했으며 또한 당시 중국의 서양선교사나 천문학자들에 의해 지전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지구의 자전만을 말한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도 근본적으로 차이점이 있다. 한편 그는 《주해수용(籌解需用)》 을 저술하여 일반 산술에서 대수학·기하학에 이르는 수학 전반을 정리했다. 또한 베이징에서 사귄 친구들이나 베이징에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과학관계 서적과 기구를 들여왔는데, 천주교 및 서양 과학의 총서인 〈천학초함 天學初函〉을 10년에 걸쳐 구입하기도 했다. 또 자신의 집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별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에서 만든 자명종(自鳴鐘)을 두고 연구하기도 했다.
저서에는 담헌설총(湛軒說叢) 이 있고, 편서(編書)에 《건정필담(乾淨筆談)》 《주해수용(籌解需用)》 《담헌연기(湛軒燕記)》 《임하경륜(林下經綸)》 《사서문의(四書問疑)》 《항전척독(抗傳尺牘)》 《삼경문변(三經問辨)》 등이 있다.
실사구시학파
실사구시학파의 특색은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엄격한 객관적 태도에 기초하여 사실을 밝히는 데 있었으므로, 자기의 이념이나 신념에 따라 경전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이전의 실학자들과는 달리, 학문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과학적인 연구태도를 부식(扶植)하는 데 큰 공적을 남겼으며, 격조 높은 학문성을 보였다. 그러나 실사구시파의 거장(巨匠)인 김정희의 경학연구는 단편적인 부분에 머물러 체계화되지 못하였으며, 일부의 아류(亞流)들은 장전(長箋)·산고(散稿) 등 백과전서적 지식을 과시하며 잡다한 나열과 지리한 변증(辨證)으로 시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실학의 사상성이나 사회개혁의 의지가 이전에 비해 쇠퇴하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 실학은 제각기 지표나 연구분야를 달리하였으나, 그 이념과 정신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실용정신이다. 기존의 주자학파가 등한시하였던 이용·후생 문제에 관심을 보임으로써 현실사회와 유리되지 않는 학문관·현실관을 전개하였다. 둘째, 실증정신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관념론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현실문제를 실증을 통해 고찰하였으며, 경서고증뿐 아니라 역사·지리·제도 등에 이르기까지 학문하는 방법에서는 근대적·과학적인 연구 태도를 지녔다. 셋째, 비판정신이다. 주자학의 전통적인 권위에서 탈피하여 자유로운 학문탐구를 존중하고, 주자학파의 학문적 폐쇄성이나 현실사회의 모순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새로운 개혁론을 제기하였다. 넷째, 개방정신이다. 종래의 주자학 일변도에서 양명학·고증학뿐 아니라 불교·노장사상(老莊思想) 및 서학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학문적 관심과 함께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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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29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6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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