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신화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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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단군 신화의 제문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며

Ⅰ. 단군신화에 대한 인식의 변천과 그에 따른 연구성과

Ⅱ. 단군 신화에 반영된 사회상

맺음말

본문내용

돈을 내야 한다. 설사 벗어나더라도 풍속에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결혼하려고 하여도 베필을 구할 수 없다.
이러한 조항이 과연 고조선의 어느 단계를 반영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발견할 수 있다. 두 번째 조항을 볼 때 배상할 곡식의 존재, 즉 먹고도 남을 정도의 곡식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노비에 관한 내용이다. 형벌로 인한 노비가 창출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의 사회적 처지가 매우 열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노예 혹은 노예적 처지의 사람들로 여겨지며 다른 사람들의 물질적 부를 획득하기 위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50만의 돈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화폐의 단위나 종류 등은 알 수 없으며 아직까지 고조선에서 화폐가 유통되었다는 적극적인 증거는 없다.
) 고조선 후기에 중국 연나라 화폐인 명도전이 유입되었음은 분명하나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리고 고조선에서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권오영, 1992 : 213)
'범금팔조'에 반영되어 있는 사회상은 사적인 소유가 상당히 진전된, 그리고 노비와 그들을 부리는 집단이 병존하는 양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노예 혹은 노예적인 처지에 떨어진 사람들은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고조선 보다 약간 후대의 국가인 부여의 경우 귀족이 죽으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여서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이 유행하였다. 고조선도 아직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노예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흔히 우리나라 건국이념이나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민본주의사상의 근거로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이나 '재세이화'니 하는 내용들을 거론하지만, 당시 고조선의 사회상은 이러한 인간존중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고조선사회는 이미 계급이 분화된 사회, 즉 죽을 때까지 일만 해야하는 노예와 그들을 부리고 심지어는 강제로 죽여서 순장할 수 있는 노예소유자들로 대립된 사회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노예들은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국가로의 발전이 언제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중국인들에게 조선이라는 세력의 존재가 인식되는 시점과 국가로서의 조선의 출발은 다른 시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로 보는 한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부터의 비파형동검문화의 발전과 고조선의 국가로의 발전은 동일한 궤도를 밟았을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4세기 후반이나 3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스스로 왕을 칭하기도 하고 중국 연나라와 무력충돌을 꾀하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중국인들의 눈에는 고조선이 교만하고 사나운 것으로 비쳐졌다. 이는 고조선사회가 이미 상당한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 권오영, 1992 : 210-212
맺음말
1988년부터 시작된 5차 교육과정 개편을 위하여 <교과서개편준거안>을 만드는 과정이 생겨났다. 1987년 확정된 이 준거안에서는 상고사에 관한 몇가지 중요한 개편 지침을 결정했다. 바로 단군신화는 역사적 사실의 반영으로, 또 고조선은 중심지가 계속 이동함에 따라 영역도 바뀌는 '이동국가'가 아니라 확정된 넓은 강역을 유지하는 '영역국가'로 기술하며,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삼국의 건국 연대를 명시하고, 중국 식민지라 할 수 있는 기자조선이나 한사군의 존재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각주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는 단군을 실재 인물로 가르치지, 신화적 인물로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학계의 현 연구단계로 볼 때,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보아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학자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연구현실과 실제 교육과의 괴리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현대적 학문에 입각한 교과서 개편이 아니라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 박광용, 2002 : 11
그렇다면 현대적 학문으로는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렇지는 않다. 마르크스 경제학에 투철했던 백남운조차도 『조선사회경제사』에서 '단군신화는 문헌상에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신화인만큼 귀중한 사료'라고 말했다.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의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 형성기부터 내려오는 사회 현실과 의식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보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의미의 실제 역사 사실로 환원하기에는, 개인과 집단의 뒤섞임, 지배이념 및 제의(祭儀)의 투영 등으로 그 해석 방식이 대단히 난해한 신화형태의 사료이자, 기원전 1000년경에 시작된 청동기 시대 전후부터 구전되면서 계속 변형되어 내려온 사료라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밝혀지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우리 역사로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지나치게 신비화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들을 대량생산할 위험성 등이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 박광용, 2002 : 12
단군신화는 어디까지나 신화에 불과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과는 구분되어야한다.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역사적이 사실로 치환시킬 수는 없다. 다만 당시의 역사상을 고려하여 과학적으로 분석할 경우 고대사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에 대한 무비판적으로 비과학적인 접근은 좁게는 고조선을 포함한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것이며, 넓게는 일반국민들에게 역사와 현실을 보는 눈을 그르치는 하는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는 점을 한번 더 강조한다.
■ 참고문헌 ■
권오영, <단군신화, 어떻게 봐야 하나>,『역사비평』1992년 겨울호(19호), p.202-213
나희라, <단군에 대한 인식-고려에서 일제까지>,
『역사비평』1992년 겨울호(19호), p.214-224
박광용, <단군, 신화에서 역사로>,『우리역사를 의심한다』,서해문집, 2002, p.10-29
박광용, <일제시기 단군 논쟁>,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역사비평사, 2000, p.13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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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09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8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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