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개괄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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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5.18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개괄적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Ⅱ. 광주민중항쟁의 발생배경
1. 계속적인 군부의 집권의지와 민주화 항쟁
2. 소외받은 광주
(1) 경제적 소외
(2) 정치적 탄압

Ⅲ. 광주민중항쟁의 직접적 발생원인
1. 신군부세력의 집권의지
2. 김대중의 구속

Ⅳ. 민중항쟁의 전개과정과 그 의미
1.전개 과정
(1) 시간의 경과를 중심으로
(2) 5·18민중항쟁, 그 후
2. 그 의미
(1) 폭력적 저항
(2) 해방된 광주
(3) 5.18광주 민중 항쟁을 바라보는 시각

Ⅴ. 미국과 5.18

Ⅵ. 항쟁의 의의

Ⅶ. 맺음말

본문내용

에 의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매도되면서도 광주시민들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가장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갔다는 점이다. 광주시가 계엄군에 포위된 채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서, 대중매체와 군 정보요원을 통한 교란작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광주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고, 피가 부족한 부상자에게는 피를 나누어 주었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는 시민들 누구나가 달려들어 그 일을 해주었다. 항쟁지도부의 인사들이 의견대립으로 서로 나뉘어 갈등을 빚을 때도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나갔던 것이다.
세 번째로 광주시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시민군이 시내를 장악한 이후 다시 계엄군이 진주할 때까지 6일 동안 광주의 시민들은, 특히 이 지역의 민중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기간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치안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토록 많은 총기류가 시민들의 수중에 있었지만, 그로 인한 불상사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이나 금은방 등 평소 범죄자들이 노릴만한 곳에서도 이 기간 중에는 전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세계 민중항쟁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의 성숙한 민주의식을 과시한 것이며 5·18광주민중항쟁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시민들에게 공격을 받은 곳은 세무서 등 그들을 억압하는 국가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거나 방송국 등 사실보도를 하지 않았던 보도매체들이었다.
그러나 시민군과 계엄군의 싸움은 정당성과 도덕성이 아니라 물리력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외부의 지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구식 개인화기만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온갖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시민군은 항쟁기간 쌓아왔던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계엄군도 광주시민들 마음속에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자랑스러움과 긍지만은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언젠가 다시 우리들 주변에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일어난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엄청난 물리력을 앞세운 군부의 진압작전으로 일단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실패한 역사로만 기억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과거로서 오늘의 우리에게 그 교훈과 의미를 되새기도록 요구하고 있다.
먼저 광주항쟁은 한국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80년에 이르기까지 극소수의 사회운동 진영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혈맹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러한 인식은 급속하게 깨져버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반미운동의 고양을 가져온 원인이 되었다.
다음으로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80년 5월의 광주를, 나아가 80년 봄의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고 들어선 제5공화국은 자신의 허약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체제로 일관하였다. 그 때마다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열망이 모아진 것은 이른바 '5.18광주민중항쟁'이었다. 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광주에서, 그리고 전국의 모든 대도시에서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고 억압적인 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국민들의 단합된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권위주의가 어느 정도 불식되었으며, 정부도 체제유지를 위하여 어느 정도 양보를 하여 미진한 수준에서나마 일반민주주의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5.18은 학문분야에서도 비약적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학문적 활동은 민주의식, 자주정신과 통일, 국민의 민족의식과 민족의 역사의식의 자각에 힘입고 있다. 아울러 그 활동의 비약은 그 정신과 의지를 다시 비약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 동안 각종 지배구조에 억눌려있던 일반 시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의 진행과정에서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수습을 꾀하던 지역 내 유지들과 시위에 직접 참가하여 항쟁을 주도하던 일반시민들 사이에는 결코 일치될 수 없는 입장의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단순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서 해결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점에서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80년 이후 항쟁의 경험이 준 교훈은 일반시민들의 단합된 힘만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뒤 바꾼 전대미문의 시민무장봉기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80년 5월, 광주시민의 선혈을 발판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그러나 20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5, 6공화국의 집권층이 보여준 광주양민학살만행과 천문학적인 부정부패가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은 '역사와 정의와 법'에 의한 단죄의 행로를 걷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영택, 實錄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정해구, 광주민중항쟁연구, 사계절출판사, 1990.
논문
김상곤, 재판을 통해서 본 5.18의 정치사적 의미
차병직, 12.12와 5.18재판에 대한 평가
이삼성, 광주를 통한 한국민주주에의 유혈통로와 미국의 위치
박광주, 5.18 왜, 어떻게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
한상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본 국민 주권과 승인 투쟁
웹사이트
광주광역시: www.gwangju.go.kr
5.18가상체험공간: www.cyber518.gwangju.kr
5.18기념재단:www.518.org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altair.chonnam.ac.kr/~cnu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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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6.13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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