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 개혁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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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도전과 개혁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1.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맥락
2. ‘유자’에 의한 통치론

II. 정도전 정치사상의 경세적 맥락과 유자
1. 신유학적 개념 틀의 도입과 불교 비판
2. ‘수기치인’의 구도에 따른 이해
3. 민본주의와 부국강병 - 유·법의 융합 -

III. 유교적 관료체제의 재설계
1. 고려체제의 문제
2. 신관료의 모델
1). 정도전의 유자에 관한 담론
2). 역사상의 구체적 모델
3. 조직 및 제도의 재정비
1). 인재의 양성과 충원 및 평가
2). 군/신 관계의 재조정
3). 언권의 확대와 보장
4). 관/민관계의 재설정
5). 토지제도 및 군사제도의 개혁

IV. 결어

본문내용

보다 강력한 권력의 집중을 통하여, 또 현능한 재상을 통하여 유교적 합리성에 기초한 정치행정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그의 개혁적 비전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왕실의 재정과 왕실의 일도 재상이 관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는 고려체제가 귀족중심의 다수의 宰樞가 정책결정의 중심에 있음으로 해서 사적인 기득권의 보호에 치중하였던 폐해의 수정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도전의 재상에 관한 논의는 산만하거나 우발적인 ‘표시들(remarks)Quentin Skinner, "Meaning and Understanding" ed. by James Tully, Meaning and Context,(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8).
'이 아니고 의도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주장된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의 재상중심의 정치구상은 정도전 자신의 독트린이라 할 수 있겠는데 그는 齊桓公-管仲, 劉備-諸葛亮과 같은 모델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도전은 군/신 관계에 있어서, 정치의 중심을 재상에게 두는 것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여 권력을 나누려고 한다. 그가 찬진한 「經濟文鑑」의 상권은 전편이 재상에 대한 서술이고 하권은 대관과 위병 그리고 감사, 주목, 군태수, 현령 등 지방관에 관한 것이다. 그가 이러한 정부조직상의 직책을 유교적 관료체제의 핵심적인 것으로 보아 비중을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군주는 재상을 선택하고 재상은 장관을 선택하고, 장관은 具僚를 선택하는 인사권의 하향식 위임을 생각하고 있다 「經濟文鑑」上, 宰相, <相業>.
.
3). 言權의 확대와 보장
정도전은 정치행정의 기강을 담당하는 어사부(사헌부)의 역할을 매우 높게 평가하여, 일반적으로 벼슬살이에서 영예로운 직책이라고 하는 재상과 한림, 어사 가운데서도 어사의 영예가 가장 중하다고 한다 「經濟文鑑」下, <臺官>.
. 이는 정치행정의 기강이 민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간쟁을 하는 간관의 직책도 소중하게 생각하여 직위는 낮지만 그 역할은 재상과 동등하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옛적에는 간함에 정원이 없어서 언로가 더욱 넓었다” 하고 위로는 公卿大夫와 아래로는 士庶商賈百工의 비천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간쟁할 수 있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보았다 「經濟文鑑」下, <諫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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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민관계의 재설정-‘민본성’의 강조-
정도전은 관/민관계에 있어서 관이 백성의 보호자이며, 백성의 불편한 곳을 찾아가서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민본적 구도에서는 ‘민’의 정치적 자율성이란 개념은 생겨나지 않지만 관이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존재의의가 없다고 생각한 철저한 ‘민본성’은 전근대 시대의 ‘유교적 합리성’의 척도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함이다(張官置吏 本以爲民) 「經濟文鑑」下, 縣令, <守令不任事>.
”라고 하여 관청과 관리의 존재목적이 백성에게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5). 토지제도 및 군사제도의 개혁
정치에 있어서 경제적 토대와 군사적 무력은 핵심적인 기초가 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려말은 전제의 문란이 국가체제의 근본을 와해시킬 정도에 이르렀으니, 1인이 경작하는 토지에 지주가 7-8명에 이르는 곳도 있어, 도조를 바칠 때면 지주의 인마의 비용과 왕래하는 노자의 비용이 본 도조 보다 더 많은 경우가 많아 농민들의 원망이 매우 심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서 국내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여 국가소유로 만들고 인구비례에 따라 토지를 분배해서 민본적인 토지제도를 회복하려 하였다 『三峰集』,卷7, 拾遺, 箋, <恭讓朝辭右軍總制使箋>.
. 李穡, 禹賢寶 등과 구가세족들은 대부분 반대하고 정몽주는 가부를 결정치 못하고 尹紹宗, 조준 등은 정도전의 뜻에 찬동하였는데, 숫적으로는 열세였으나 결국 이성계의 무력을 배경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다 昌王 옹립 직후 사전제도 개혁을 都評議使司 회의에 회부하였는데, 참가자 53명 중 개혁안에 찬성한 사람은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 신진관료 18-19명이었고, 나머지는 반대하는 이색의 주장을 따랐다. 이때 정몽주는 중립을 지켰다.『高麗史』,권118, <趙浚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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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군사제도의 개혁은 고려의 유습인 사병제도를 혁파하고 兵農一致의 원칙에 의하여 모두 국가의 군대로 일원화하고 지휘체계를 일원적으로 정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많은 저항을 받았으니 上揭 ‘箋’에 보면 공양왕 때의 군제개편과 더불어 정도전이 구가세족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혁명주체 내에서도 이러한 개혁에 저항하는 경향이 컸다. 즉 모두 군사적 지분을 갖고 혁명에 참가한 세력들은 새로운 관료체제에 고용인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정도전은 이러한 불만을 역이용한 왕자 이방원과의 투쟁에서 패퇴하고, 그의 계획은 역설적으로 그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태종 이방원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IV. 결어- ‘儒者統治’에 의한 ‘民本富國’의 관철-
정도전은 정치행정에서 ‘민본성’을 관철해야 한다는 민본주의 노선을 견지했으며, 동시에 이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부국강병’도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정치행정의 영역에서 왕실귀척들의 私的 領域을 제한하고 ‘儒者’로 충원되는 재상과 언관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 관료체제를 통해 국가의 公的 領域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는 ‘儒敎的 合理性’의 강화로 조선조 사회의 특성 내지는 근세적 특질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고려체제의 난맥상을 인사제도의 전반적인 부패에서 찾고, 도덕성과 경세성, 특히 경세적 능력을 갖춘 ‘유자’라는 새로운 관료유형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재상권의 강화와 言路의 확대, 국가에 의한 지방의 일원적 지배, 사병의 혁파와 일원화된 군사 지휘체계의 구축 등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구도를 창출할 수 있었던 사상적 기반은 ‘修己’와 王道政治를 강조하는 맹자적 모델의 정통 유가사상 뿐만 아니라, ‘治人’과 경세에도 동등의 비중을 두며 覇道政治도 긍정하는 순자적 모델의 功利主義 노선도 정도전의 사상에는 함께 통합되고 있었던 것이다.

키워드

정도전,   개혁,   유교,   유학
  • 가격2,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6.07.02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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