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 일본 팽창주의의 결과인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압박의 결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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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태평양전쟁의 배경
1. 국내상황(군국주의의 등장)
2. 태평양전쟁 당시 국제 정세

Ⅱ. 태평양전쟁의 경과
1. 전쟁 발발
2. 전쟁 초기 일본의 우세
3. 전선고착과 연합군의 공세
4. 패전
5. 연합군의 조정

Ⅲ. 태평양전쟁의 결과
1. 약소국의 독립
2. 동북아시아 권력 구조의 변화
3. 일본의 전후처리

태평양전쟁의 의의-태평양전쟁사관과 대동아전쟁사관을 중심으로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본문내용

경제난을 더욱 부추겼다.
1930년 런던 해군회의에서 일본해안에서 일본이 패권을 갖지 못하도록 한 결정이 일본으로 하여금 공격적이게 만들었다. 이에 일본은 군국주의 체제를 구축하면서 군비확대를 통한 아시아 지배라는 명분으로 만주를 침략하고, 급기야 1937년에는 중국을 침략한다. 이에 유럽 열강들이 일본에 대한 제재를 가한다. 특히 미국은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를 취하고 1939년에는 미일무역협정을 파기한다. 일본이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고, 아시아에서의 무력침공을 강화하자 미국은 더욱 강력한 제재를 가하게 된다. 특히 원유와 철강에 대한 대일본 수출을 중단하면서 일본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포기하든지 전쟁을 통해서라도 자원을 확보하든지 간의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전쟁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수정주의의 또 다른 시각인 Paul Schroeder 의 견해는 전쟁의 근본 원인을 미국에 보다 초점을 두어 분석한다. 미국의 대일정책은 일관성 부족했고, 현실성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 코델 헐의 도덕주의적 대일본 정책에 따르면 미국은 일본에 대해 강경하고 무리한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1941년 7월까지는 일본이 호전적이었다면, 이후는 도리어 미국이 호전적이었다. 1941년 7월까지 미국의 목표는 일본의 남쪽 침략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을 해방시키려는 제3의 목표는 비현실적이었다. 중국의 독립보전은 당시 미국에게 실질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지역에서의 도덕적 외교였다. "미중간의 무역이익은 대일전쟁 비용 1주일 분보다도 적다."는 분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III. 티모스적 시각
티모스적 시각은 일본의 입장에서 볼 때 티모스(비분강개심, 또는 분노)의 정의감이 발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1020년대 워싱턴체제의 유럽열강들의 푸대접. 그리고 전간기의 미 주도 동아시아 질서에 반발해 전쟁의 발발 원인이다. 다음의 자료를 통해 티모스적 시각을 살펴보자.
1. 표면적 협동과 내재적 갈등의 시기 (1919~1929)
윌슨의 이상주의가 대두되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이익갈등이라는 현실주의적 인식을 가진 시기이다. 육군의 이사와라 칸지와 해군의 카토칸지는 일본의 자족을 위해 한국, 대만, 남사할린 이상의 영토, 즉 중국 전체 영토가 필요하다는 논의를 하였다. 이는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사와라 칸지의 전쟁이론의 토대가 만들어진 시기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워싱턴 군축회의 일본대표단 대표이자 해군대신이었던 카토 토모사부로의 보좌관 카토 칸지가 70%에 이르는 일본 군비 증강을 주장하는데 이는 관철되지 않았다.
2. 티모스적 폭발 (1929∼1937)
대공황시기로서 미국의 이기주의적 경제정책이 수행된 시기이다. 미국의 대일본 관세 100% 이상이었던 반면, 필리핀, 남미에 대해서는 우대하였다. 또한 영연방인 인도가 일본에서 수입하는 면에 대해 관세를 높였다. 인도의 대일본 관세는 75%로 매우 높았던 반면, 인도의 대영국 관세 25%였다. 또한, 1930년에는 런던해군군축회의가 개최되었다.
3. 노구교에서 진주만까지 (1937∼1941)
노구교사건 당시 중국은 국내통일과 경제재건이 완성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의 대중전쟁은 합리적 결정이라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신속한 승리가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비합리적 승산 계산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태평양전쟁은 결국 미국의 대일정책, 즉 일본에 대한 경제적 압력 증가, 중국에 대한 직접적 원조 증가 등이 기존의 일본의 티모스에 영향을 미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
지금까지 태평양전쟁의 원인부터 의의까지 살펴보았다. 대동아의 단결을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의 팽창주의가 이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을 더 타당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행동에는 식민정책과 함께 더 넓은 영토의 획득을 시도하려 했던 일본으로서는 당시 유럽의 정세가 전쟁의 승산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서구의 식민지화되어 가던 동아시아의 위상을 올리려는 이유로 전쟁을 치뤘다는 명분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국제 정치의 무대에서 괄시받던 동아시아를 견고히 한다는 명분을 뒤에 업은 일본의 군국주의는 합리적 결정보다는 비이성적 기, 정신력, 공격정신, 충성심, 애국심 등을 강조하며, 팽창적이며 모험주의적인 노선을 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팽창주의적인 측면이 한반도와 만주로의 세력 확장에 뒤이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측면에 모든 원인을 돌리기엔 한계가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음에도 전후처리 과정에서 미국이나 여타 서양의 국가에 비해 만족할만한 대우를 받지 못한 점이나, 워싱턴 회의에서도 미국과 영국에게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한 점, 세계 경제 대공황 이후 미국이 일본에 대해 행한 고관세 부과 정책과 같은 보호주의적인 무역정책이 자본주의가 막 정착하고 있던 일본의 생존을 위협하였고, 일본의 티모스적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독 일본에게만 냉대한 정책을 취했던 미국의 입장이 일본을 팽창주의적인 측면으로 만들고, 일본으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데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두 측면을 고려하였을 때에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팽창주의적인 측면에 그 원인을 무조건 전가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일본에 대한 압박이 일본을 전쟁으로 이끈 측면이 존재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목 차
Ⅰ. 태평양전쟁의 배경
1. 국내상황(군국주의의 등장)
2. 태평양전쟁 당시 국제 정세
Ⅱ. 태평양전쟁의 경과
1. 전쟁 발발
2. 전쟁 초기 일본의 우세
3. 전선고착과 연합군의 공세
4. 패전
5. 연합군의 조정
Ⅲ. 태평양전쟁의 결과
1. 약소국의 독립
2. 동북아시아 권력 구조의 변화
3. 일본의 전후처리
태평양전쟁의 의의-태평양전쟁사관과 대동아전쟁사관을 중심으로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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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05
  • 저작시기2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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