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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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여성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삼국시대
1.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 소서노
2. 신라의 성문화와 혼인
3. 신라의 여인들

Ⅱ. 통일신라시대
1. 유교의 도입으로 인한 여성 지위의 변화
2. 여성의 신분
3. 여성의 지위변화
4. 통일신라시대의 여성의 경제 활동
5. 문학으로 본 통일신라시대의 여성상

Ⅲ. 고려시대
1. 조선시대와 다른 사회분위기, '첩 두자'는 상소에 팔 걷어부친 여자들
2. 시집살이 않는 여성, 처가살이하는 남성
3. 아들 딸 차별없이 균등 상속, 균등 의무
4. 아내 재산 따로, 남편 재산 따로.
5. 이혼 문제
6. 여성도 호주가 되었던 사회

Ⅳ. 조선 전기
1. 당시의 시대상과 여성의 지위
2. 가족 제도
3. 일상생활에서의 여성에 대한 규제

Ⅴ. 조선 후기
1. 조선후기 유교사상의 정착
2.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
3. 여성의 지위와 권리

Ⅵ. 해방이후 - 당시의 문학을 통해 본 여성
1. 1910년代
2. 1920년代
3. 1930년代
4. 1940년代

Ⅶ. 해방이후
1.민족분단기
2. 건국초기
3.1960년대 이후

본문내용

회, 대한가정학회 등 전문여성단체 및 한국노동조합총연맹부녀회 등이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대한여학사협회를 비롯해 여성문제연구회와 부설단체 가정법률상담소 등이 설립되었다. 1959년 당시의 주요 여성단체 8개가 연대해 한국여성단체협의회(이하 여협)를 창립, 세계여성단체 협의회에 참여하고 이후 소속단체 50여개가 넘는 여협으로 발전, 서울여성의 힘을 과시하였다. 여협을 중심으로 이들 여성단체는 당시 부진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 및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일원으로서의 여성 역할을 강조하였고 정부가 미처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들을 민간 차원에서 보완하는 데 주력하였다.
(3)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
1952년 최초의 여성법조인 이태영, 54년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 등 소수 여성의 법조계 진출과 여성정치인으로 나중에 야당 당수가 되기도 하는 박순천, 부통령에까지 출마한 임영신 그리고 대한여자청년단 단장 모윤숙 등에 의해 당시 여성의 지위향상 문제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많은 지도층 여성들이 민중여성의 삶이나 여성정책 개발 등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나 인식은 충분하지 않았다.
한편 서울을 중심으로 김활란, 이숙종, 고황경, 배상명, 송금선, 차미리사, 황신덕, 박인덕 등 교육계 여성들의 활약도 두드러져 이들이 키워낸 수많은 서울여성들의 사회적 진출과 활약이 가능했다. 서울여성들은 또한 '치맛바람'이라는 유행어를 낳을 만큼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이후 한국의 사회경제 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동시에 서울여성들은 이 같은 자녀교육에의 지나친 기대와 열망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도 자신들이 해결해야 할 교육개혁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상과 같이 당시 서울여성은 여협 등 여성단체를 통한 사회활동이나 개인적으로는 나름대로 여성직업이나 능력 개발의 측면에서 꾸준히 성장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3.1960년대 이후
(1) 사회의 발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계속된 독재의 문제는 1960년 4.19 민주혁명의 미완으로 1961년 5.16 이후의 제3공화국에서, 그리고 1970년대 말까지도 권위주의와 가부장제라는 비민주적 요소는 극복되기 어려웠다.
(2) 여성시책의 전개
3공화국을 전후한 1961년 초 여협 소속 57개 여성단체는 해산되고 6월에는 재건국민운동중앙회 부녀부 및 시립부녀사업관, 탁아소 설치 및 경제개발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1962년 가족계획(정확한 용어는 산아제한)정책을 실시 장려하였다. 또한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1963년 제정, 국가에서 직업보도소, 부녀상담소, 여성회관, 윤락여성선도대책위원회 등을 설치해 윤락여성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동법은 그 적용에 있어 매매한 자를 모두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1963년에는 보건복지부 산하의 부녀국이 부녀아동국으로 개편되어 각종 여성관련 업무를 담당하였고, 1970년에는 노동청에 근로기준관실이 만들어져 여성근로업무를 관장하였다. 1973년에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하는 동시에 일련의 여성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인구 20만명 이상의 시에 부녀아동과를 설치하고, 기타 시군에 부녀복지계를 두었다.
한편 서울시는 1960년대부터 도시화·산업화에 따라 가출여성과 저소득 근로여성에게 관심을 두고 윤락예방사업에 역점을 두었으며, 직업보도사업 전개, 부녀상담소·시립부녀사업관·시립부녀보호소 설치 등의 성과가 있었다. 1970년대에는 핵가족화 및 산업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생활방식이 급변함에 따라 생활문화교육 및 여성들의 취업교육수요가 증가하였다. 이 시기에 시립여자기술원과 구로부녀복지관을 개관하였고, 각 구청에 부녀계가 신설되어 부녀교실을 중심으로 한 교육사업에 많은 재원이 투입되었다.
(3) 여성단체 활동
① 여성근로현황
한편 당시의 경제 발전은 농촌을 떠난 미혼여공들이 '공순'이라는 사회적 멸시와 천대 속에 최장시간의 노동과 최저임금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여성노동력은 연평균 4.5%의 증가율을 보였고, 1974년 전체 취업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37.2%였다. 그리고 1963년부터 남성 광원 파독에 이어 1966년 1월 간호원의 서독 파견은 최초의 해외파견 사업으로 이후 여성 해외 취업의 계기를 마련한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② 여성노동운동
서울여성 노동운동은 1960년 8월 경성방직 여공 8시간 노동요구시위, 70년대 초 서울대병원 간호원 임금인상요구 및 영등포 방림방적 여성근로자 체불노임 지불요구 농성, 1979년 8월 YH 무역회사 여성근로자 집단해고 항의 및 서울 구로 신민당사에서의 농성 등은 거의 10년을 주기로 그 맥을 이어갔다. 특히 1970년 11월 서울 청계피복노조 전태일 분신자살로 촉발된 여성노동운동은 섬유, 전자·전기, 식료품 등 제조업 분야에서 생산직 여성민주노조의 조직과 그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어간다. 또한 70년대 서울여성운동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로는 여대생들이 주도한 기생관광 반대시위가 여성상품화에 대한 보편적인 문제제기에서부터 이후 일제시기 군위안부 그리고 미군위안부 및 일반 매매춘 여성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일반 시민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서울여성의 삶에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주요 과제로 떠올린 것이라 하겠다.
③ 여성지위향상
그밖에도 1975년 초 대한간호협회가 추천한 기혼여성 해외파견 부적격 판정에 대한 비판과 항의, 서울YWCA의 직업여성 차별정년제 폐지 요구에 이어 1977년에는 한국금융단이 4년제 대졸여성 신입· 중견사원을 채용하였으며 가정법률상담소에 동성동본혼인문제 신고센터가 개설되었다. 동시에 1977년 말 민법 개정에 이어 1979년 개정 가족법 시행 등은 이후 여성문제를 풀어 가는 좋은 실마리가 되었다.
동시에 정부의 1975년 유엔 '세계 여성의 해' 선포에 이은 1979년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 채택 등은 서울여성사회에도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1977년 대학의 여성학 개설은 여성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이론의 연구 개발과 여성운동에 대한 새로운 방법과 실천을 모색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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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7.10
  • 저작시기20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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