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국과 총력전의 중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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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제국과 총력전의 중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대만과 조선의 경제적 변화

2.전시의 식민지사회의 변용

3.총검과 군화의 아래서 ― 제국의 전시동원

4.전쟁 중의 제국 1937~1945

본문내용

동원한 것으로 패전은 이미 결정적이 되었고, 일본에는 이미 연합국에 의한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에의 반공을 저지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식민지의 주민 가운데, 남양의 도민이 일본에서 해방된 최초의 주민이 되었다. 개전의 시점에서는 그들의 태도는 항상 수동으로, 때로는 협력조차 있었지만 종전이 가까워오자 같은 주민들이 일본을 완전히 버렸고 어느 섬에서는 봉기까지 일어났다. 이반의 모습과 시기, 강함을 남양전체를 통해 일반화하는 것은 어렵지만, 거기에는 세 가지 기본적인 요인이 있다. 첫 번째로 도민에 대한 일본군의 무신경과 잔학성이 있었고, 두 번째로 전쟁이 부른 촌락사회의 궁핍에 있었으며, 세 번째는 전국이 악화됨에 따라 도민이 일본인에게는 이미 자신들을 지키는 통치적 힘이 없다고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남양의 도민이 최초로 환멸을 느낀 것은 일본군의 도착 직후였다. 물자의 징발, 노동력의 징용, 그리고 재산과 토지의 점유 등은 남양 전체를 걸쳐 일본군의 기지가 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러한 행위에 의해 도민이 약간이지만 품고 있었던 일본군에 대한 공감도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미국 해군의 디딤돌 작전의 공격대상에서 탈락되어 남겨진 일본군 기지에서는 상황이 절망적이게 됨에 따라 도민에 대한 취급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일본군의 횡포가 도민을 적대시키는 것까지는 않았던 곳에서도 심리적으로는 일본인부터의 이반이 일어났다. 또 일본군이 물자의 결핍과 기아에 괴로움을 당했던 것과 같이 도민도 곤란에 직면에 직면해 있었다. 미군의 空爆과 함포사격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도민을 죽음과 파괴의 공포에 몰아넣었고, 마샬 제도에서 시작된 미군과 일본군수비대와의 사투에 의해 도민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개전 즈음에는 일본에 강한 반감을 품은 도민도 반대로 강한 애착을 갖고 있던 도민도 거의 없었다. 개전후가 되어도, 적은 수의 열정적이고 애국적인 청년 엘리트층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민은 전쟁과 일본의 전쟁목적을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戰局이 악화되어 미군이 섬에 상륙하자, 많은 도민은 지금까지 많은 수의 외국세력의 지배의 교대를 봐왔던 만큼 일본과의 정을 재빨리 끊어버렸다. 또 일본군의 사기가 흩어져 도민에 대한 고문, 처형, 기관총에 의한 대량살륙 등을 행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한 번에 일본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폭력적인 보복까지 시작하였다.
일본제국 가운데서도 공폭이 없던 樺太는 여전히 후방지대에 있어서 일본의 권위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주민들도 대부분 종전까지 평정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이 되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소련이 돌연 선전포고한 북방에서 공격해 오는 데에 이르자 제국 가운데 평온한 지역은 사라지게 되었다. 樺太는 소련군에게 수륙양면으로 공격받아 순식간에 점령되었다. 40만 명의 일본인은 약4만 명의 조선인을 남겨둔 채 홋카이도로 전후 송환되었지만 남은 조선인의 문제는 또 하나의 미해결 전후처리문제가 되었다.
소련의 기갑사단은 만주에서 조선, 관동주에도 진격해, 일본인은 군민과 함께 도망할 길을 찾아 갈팡질팡하였다. 소련군이 조선에의 진격을 중지한 것은, 미군이 반도 남부에 상륙해 북위 38도선을 사이로 양군이 점령지역을 잠정적으로 나누는 것에 합의했던 때였다. 조선주재의 일본 민간인은 이미 당국의 보호가 없어졌기 때문에 조선인의 증오에 노출되어 있었다. 군중에게 두드려 맞는 일이 있거나 상점이나 주거가 火攻을 당하거나 강탈당하고, 일본의 신사는 격앙되어 해방으로 들끓는 조선의 군중에 의해 분분히 파괴되었다.
대만에 있어서 일본통치의 종언은 조선보다도 훨씬 평온했고 무사히 행해졌다. 항복 후에도 대만 총독부는 시정권을 국민당군에 넘기기까지 수 주 간에 걸쳐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이관사무를 보는 계속할 수 있었다. 1945년 10월 중순이 되자, 처음 국민당군이 도착해 시정권의 인수를 받아 대만이 이후 중화민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됨을 선언하였다. 시정권반환식은 극히 공식적인 형태로 행해져, 권력의 위양에 어떤 혼란도 봉기도 없었다.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제국은 연합국간의 여러 가지 전시협정에 따라 해체되고 있었다. 樺太는 완전히 소련이 지배하에 두어, 사할린 전토에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관동주와 대만은 중화민국에 반환되고 남양군도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령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땅이 되었다. 조선은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 「적당한 과정」을 거친 후의 독립이라는 약속에 따라, 최종적 결정을 장래에 양보한 불투명한 지위대로 우선 미·소 양국에서 분할 점령되었다.
이제껏 식민지에 거주했던 일본인과, 전화로 제국의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된 식민지 주민, 특히 압도적 다수의 조선인들을 각각의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일본식민지의 잔재를 일소하는 최후의 큰일이었다. 종전에서 3년이 지나, 백오십만명의 조선인이 여러 곤란을 넘어 조선반도에 귀환했지만, 약50만 명은 여러가지의 이유에서 일본에 남는 일을 택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처우를 둘러싸고 격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종전에 즈음하여 해외에 거주하던 일본 민간인은 군안과 함께 연합군에 의해 모이게 되었지만, 소련이 점령한 관동주·화태·북조선에서는 수만의 일본인 병사와 민간인이 시베리아의 노동수용소에 보내져 많은 수의 사람이 사망하였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귀국까지 오랜 기간 어쩔 수 없는 수용소생활을 지속하였다. 중국과 미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대만·남조선·남양에서는 일본인의 송환은 몇 개월만에 끝났지만, 그들이 일본본국에 돌아왔을 때 그곳은 초토로 변해버려 그들이 앞장선 예전의 제국주의적 모험도 지금 국제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일본제국은 신속한 한편 완전히, 한사람도 한탄하고 슬퍼하는 사람없이 막을 내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자에서 피지배자로의 권력위양은 서양의 탈식민지화의 경우와 달라서, 식민지관료 기구 스스로가 공손하게 식전을 행해 퇴장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의 해방은 일본을 쓰러뜨린 제국에 의해 포고되고, 전승국의 육해양군에 의해 집행되었으며, 해방된 제민족은 구지배자에게 감사의 기분 등을 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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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8.16
  • 저작시기2006.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1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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