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경당의 한국 교육사적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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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경당의 한국 교육사적 정통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경당의 정의

* 경당의 형태 및 교육적인 성격

* 경당의 기능

* 경당의 교육사적 정통성

본문내용

않은 교육적(敎育的) 비중(比重)을 차지하는 점에 역사적(歷史的) 의의(意義)가 있다. 신라의 화랑도(花郞道)는 고구려의 경당에서와 같이 문무일치의 교육기관으로 신라(新羅) 고유(固有)의 사상(思想)에다 유(儒). 불(佛). 선(仙)등 외래사상(外來思想)을 섭취하여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수양적 지침으로 삼고 국가에 보국충사(報國忠死)할 수 있는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하여 우수한 자를 택해서 국가관료로 등용하는 신라 고유의 독특한 교육단체(敎育團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랑도(花郞道)는 평화시에는 사회적(社會的) 지도자(指導者)를 기르는 「수양단」으로서, 유사시에는「전사단」으로서의기능(機能)을 다하는 청년단체(靑年團體)인 것이다. 화랑(花郞)의 기원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것은 비단 신라(新羅)에 국한하지 않고 상고시대(上古時代)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화랑도(花郞道)가 하나의 제도(制度)로 조직화되고 체계적화된 것은 신라 24대 진흥왕 37년(576)에 이르러 비로소 원화(源花)를 봉하였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전술한 화랑도(花郞道)의 교육목적(敎育目的)을 달성하기 위한 화랑도의 교육내용(敎育內容)과 방법(方法)으로서는 대자연을 교육도장으로 하는 다음의 세 방식을 지적할 수 있다. 즉①도의(道義)를 연마(硏磨)하고, ②시(詩)와 노래를 즐기고, ③산수(山水)를 오유(娛遊)하는 것이었다. 화랑(花郞)들이 산수를 찾아 즐긴다는 것은 스스로의 심정도야(心情陶冶)는 물론 견문(見聞)을 넓히고 국토 (國土)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고 또 자연예찬과 자연의 신비성을 깨닫게 하는 좋은 교육방법(敎育方法)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에 와서 가끔 젊은이들이 국토순례를 하는 것도 이러한 화랑정신(花郞情神)과 관계가 깊은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또 지리답사, 격전지순례, 고적 및 승지조사 등도 화랑(花郞)의 산수오유(山水娛遊)를 통한 심신단련과 직관도야(直觀陶冶)의 교육방법에 연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三國時代)때 서천군은 백제에 속해 있었다. 온조(溫祖)가 위례성에 처음 도읍 하였을 때 서천군 지역은 마한(馬韓)의 비리국(卑離國)이었고 백제가 부여로 도읍 하면서 서천군은 1군2현으로 나누어진다. 즉 마한의 비리국이 자리하였던 지금의 종천면(鍾川面) 지석리(支石里)에 비중현(比重縣)의 고을이 앉게 되고 한산(韓山)에는 마산현(馬山縣)이 또한 서천(舒川)에는 설림군(舌林郡)이 자리하게 되어 세 고을로 나뉘어 졌다. 백제의 중심이었던 한산(韓山)지역에서 형식적, 비형식적 교육이 행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 영향으로 백제 멸망 후에도 2만의 군사가 웅거하여 백제재건의 본거지가 외었던 것이다.
넷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의 교육(敎育)은 신라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이룩한 것은 30대 문무왕 16년의 일이다. 이로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학교교육(學校敎育)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당의 국자감제도를 모방한 그것이 국학(國學)의 성립(成立)이다. 즉, 통일신라(統一新羅)의 학교교육(學校敎育)은 31대 신문왕 2년(682) 6월에 국한(國學)을 세워 예부(禮部)에 속하게 한데서 비롯된다. 신라의 국학(國學)은 신라가 통일정치(統一政治)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당(唐)의 국자감제도를 모방하여 국가의 인재(人材) 양성(養成)과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한 교육기관(敎育機關)인을 알 수 있다. 국학(國學)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資格)은 그 관계(官階)가 12관등인 으로부터 무위자에 걸쳤으며 연령(年齡)은 15세에서 30세까지를 원칙으로 하였다. 국학(國學)을 졸업 등급 중에서 (卒業)하면 신라의 관직 등급 이상의 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교과내용은 유교적(儒敎的) 윤리관(倫理觀)을 확립하는데 필요한 유교(儒敎)의 경전이 주가 되었다. 이 외에도 잡학교육으로서 기술교육인 의학(醫學), 율학(律學), 천문학(天文學), 산학(算學)등이 있었고 이에 관련된 제업박사가 있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고 있다. 국가(國家)의 인재(人材) 양성과 관리(官吏) 양성기관으로 성립된 국학(國學)은 그 교육적(敎育的) 기능을 통일초기에는 다 할 수 있었으나 모든 국가제도가 어는 정도 정비대 된 통일신라 중엽에 와서는 국학(國學)이 새로운 모습을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38대 원성왕 4년(788)에 나타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의 출현이다. 독서출신과는 일명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라 부르는 바, 이것은 일종의 과거제도(科擧制度)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독서상품과(讀書三品科)는 국학(國學)에서 수학한 학생들의 성적을 上ㆍ中ㆍ下의 3등과 특등의 4급으로 나누어 등용서열을 정하는 것을 말한다.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 제도(制度)는 지금까지 신라의 인물등용(人物登用) 방법(方法)이 족벌 또는 학벌본위에서 인물본위로 즉, 실력 또는 시험본위에 제도로 전환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신라(新羅)의 교육(敎育)은 통일(統一) 이전에는 형식적(形式的) 교육기관(敎育機關)은 없었으나 화랑도(花郞道) 교육(敎育)을 통하여 도덕교육(道德敎育), 인격교육 그리고 정서교육(情緖敎育)등으로 전인교육을 실시한데 반하여 통일신라 이후에는 형식적 교육기관이 생기고 유교적(儒敎的) 경전(經典)을 중요교육내용으로 삼으며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전환하여 인격(人格)이나 도덕교육(道德敎育)보다는 당시의 유교적(儒敎的) 교육내용(敎育內容)에 얼마나 정통(正統)하였느냐에 따라 출세의 문호가 열리는 제도고 바뀌어졌다. 이와 같은 현상은 고려시대, 조선시대(朝鮮時代), 나아가 현대(現代)의 교육(敎育)에 까지 그 영향을 크게 끼치고 있어 전인격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고 있다. 오늘의 서천군(舒川郡) 지역(地域)은 신라 제 35 대 경덕왕 15년(756)에 설림군(舌林郡) 또는 남양군(南陽郡)으로 부르던 일대가 서쪽에 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자리한 고을이라 하여 설림군(舌林郡)으로 부르게 되고 비중현(比衆縣)은 비인(庇仁)이 큰 마을로 등장함에 따라 비중현(比衆縣)이라 하였다가 역시 서림군(西林郡)의 영현이 되고 한산일대(韓山一帶)는 백제때 마산현에 속했다가 신라때는 가림군의 영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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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07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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