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글
- 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경제 상황과 외교 관계
Ⅰ. 제 3 공화국 시기 외교 관계를 통한 경제개발자금 확보
(1) 대일 관계(한일 회담)를 통한 확보
(2) 대미 관계(베트남전 파병)를 통한 확보
Ⅱ. 대일·대미 관계 : 미국과 일본에 대한 경제 의존도 심화
Ⅲ. 박정희 경제외교에 대한 평가
(1) 부정적 측면
(2) 긍정적 측면
나오는 글
- 박정희 시대의 한국의 경제 상황과 외교 관계
Ⅰ. 제 3 공화국 시기 외교 관계를 통한 경제개발자금 확보
(1) 대일 관계(한일 회담)를 통한 확보
(2) 대미 관계(베트남전 파병)를 통한 확보
Ⅱ. 대일·대미 관계 : 미국과 일본에 대한 경제 의존도 심화
Ⅲ. 박정희 경제외교에 대한 평가
(1) 부정적 측면
(2) 긍정적 측면
나오는 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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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8
2,394
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60년대의 대외관계와 남북문제』,125p
이처럼 한국 경제는 특히 66~69년 사이에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표3>참조), 이때가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때 이며,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되었을 때와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경제외교는 경제발전에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정희가 처음 정권을 잡을 때와 비교하면 불과 10년 사이에 모든 면에서 몇 배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정부가 들여온 공공차관으로는 발전소 및 댐 건설, 철도 및 고속도로 등 사회의 간접자본시설을 확충하였으며, 상업차관으로는 정유, 화학, 시멘트, 철강 등 전략적 기간산업을 설비·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즉, 현재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이룩한 산업화가 이 1960년대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는 글
지금까지 제 3공화국 시기의 외교를 통한 경제개발자금 유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박정희는 미국, 일본, 서유럽 등 외자유치가 가능했던 모든 곳에서 외자유치를 하여 경제개발에 사용하였다. 물론 쿠데타로 획득한 정권이기에 국민들의 반발의 무마용으로 경제개발정책을 우선적으로 펼친 것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든지 경제개발정책을 우선으로 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외교적인 측면에서 한일회담과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서는 비판론이 만만치 않다. 한일회담을 굴욕적인 회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베트남전 파병은 우리가 투자한 것에 비해 올린 성과가 적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자금이 급하게 필요하자 일본과의 회담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 한국이 일본에 비해 더 많은 양보를 하여 제시한 조건.
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서는 약 5만 명의 군사를 보냈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약 20여명의 군사를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약간 상회하는 소득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홍구, 앞의 논문, 이병천 역, 앞의 책, p304
하지만 박정희의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대량으로, 빨리 얻을 수 있었으며 특히, 그동안 좋지 않았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새로운 외자유치의 활로를 만들었다는 데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외자유치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발전이라는 최대의 결과를 얻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대부분 그의 일제시대의 친일행각과 비민주적인 독재를 이야기한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과 일본에게 외교적으로 굴욕적으로 자세를 취했다는 점을 들곤 한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에서 개발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박정희의 외교 전략은 최선책이었으며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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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60년대의 대외관계와 남북문제』,125p
이처럼 한국 경제는 특히 66~69년 사이에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데(<표3>참조), 이때가 한일회담을 통한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때 이며, 베트남전에 한국군이 파병되었을 때와 일치한다.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경제외교는 경제발전에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정희가 처음 정권을 잡을 때와 비교하면 불과 10년 사이에 모든 면에서 몇 배의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정부가 들여온 공공차관으로는 발전소 및 댐 건설, 철도 및 고속도로 등 사회의 간접자본시설을 확충하였으며, 상업차관으로는 정유, 화학, 시멘트, 철강 등 전략적 기간산업을 설비·구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은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를 이룰 수 있었다. 즉, 현재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이룩한 산업화가 이 1960년대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는 글
지금까지 제 3공화국 시기의 외교를 통한 경제개발자금 유치에 대해 살펴보았다. 박정희는 미국, 일본, 서유럽 등 외자유치가 가능했던 모든 곳에서 외자유치를 하여 경제개발에 사용하였다. 물론 쿠데타로 획득한 정권이기에 국민들의 반발의 무마용으로 경제개발정책을 우선적으로 펼친 것이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권이 들어서든지 경제개발정책을 우선으로 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실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외교적인 측면에서 한일회담과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서는 비판론이 만만치 않다. 한일회담을 굴욕적인 회담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으며, 베트남전 파병은 우리가 투자한 것에 비해 올린 성과가 적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박정희는 경제개발자금이 급하게 필요하자 일본과의 회담에서 우리에게 불리한 조건 한국이 일본에 비해 더 많은 양보를 하여 제시한 조건.
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전 파병에 대해서는 약 5만 명의 군사를 보냈고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약 20여명의 군사를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약간 상회하는 소득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홍구, 앞의 논문, 이병천 역, 앞의 책, p304
하지만 박정희의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은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금을 대량으로, 빨리 얻을 수 있었으며 특히, 그동안 좋지 않았던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새로운 외자유치의 활로를 만들었다는 데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또한 외자유치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발전이라는 최대의 결과를 얻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대부분 그의 일제시대의 친일행각과 비민주적인 독재를 이야기한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과 일본에게 외교적으로 굴욕적으로 자세를 취했다는 점을 들곤 한다. 하지만 어려운 시대에서 개발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박정희의 외교 전략은 최선책이었으며 그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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