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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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정약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폭풍 속에서 피어난 꽃
2. 실학자로서의 연구와 업적
(1) 토지(경제)개혁사상
(2) 정치사회개혁사상
3. 유학에 대한 연구
4. 기술 관료로서의 업적
5. 정조와 정약용의 관계 그리고 이용후생학
6. 천주교를 부정한 배교자였는가...론
다산 사상과 업적의 역사적 의의

Ⅲ. 결론

본문내용

종교로서 천주교에 몰입한 게 아니라 서학을 배우면서 서양의 학문으로서 접하게 되었고 점차 깊이 알게 되면서 전통의식과 제례를 부정하는 것을 보고 천주교와의 인연을 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결국, 얼마 뒤 신유사옥(1801, 순조1)때에 노론은 천주교를 많이 신봉하고 접했던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꼬투리를 잡아 대거 숙청하게 되며 다산 또한 겨우 죽음을 면하고 18년이라는 긴 시간을 전남 강진으로 유배가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오히려 다산의 실학연구가 집대성되어 500여권의 책으로 남겨졌으니 다산에게 기회가 되었던 때이기도 하고 위기와 절망을 개혁과 민생을 위한 실학 연구로 승화한 것은 정말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 다산이 천주교자였는가 배교자였는가의 시비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p 205~, 삼인, 1998
대체로 후자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한다. 그가 천주교도였다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그가 파란 많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변해 갔다고 지적한다. 애초에 열렬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점점 교회를 멀리하고 신앙을 배반했지만 나중에 참회하고 돌아왔다고 본다. 표면적인 배신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자는 다산이 젊은 시절 천주교에 경도되었으나 이를 뉘우치고 관계를 끊은 후 유교의 생활 방식을 따른 삶을 일관했다고 본다.
다산이 끝까지 천주교도의 삶을 살고자 했는지, 공공연하게 밝힌 것처럼 배교자의 길을 갔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천주교가 그의 사상과 학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하다고 한다.
Ⅲ. 결론
1. 다산 사상과 업적의 역사적 의의, 본받을 점
다산은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사상과 관습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천주교에 경도되기도 하면서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경험과 고난의 길을 통과하면서 끝내 자신만의 독특하고 방대한 학문과 사상의 체계를 구축하였다.
그가 남긴 많은 저서들은 오늘날 ‘다산학’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과 학문의 바탕에 무엇보다도 가난과 억압 속에서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당시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면면히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지은 ‘기민시’를 보면 그러한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독엔 소금 한 톨 남지 않고
뒤주엔 쌀 한 톨 없노라.
큰 솥 작은 솥 다 앗아 가고
숟가락 젓가락 다 훔쳐 갔네.
자식 이미 팔려 갔고
내 아낸들 누가 사랴.
내 가죽 다 벗기고
뼈마저 부수려나.
부모여, 사또여
고기 먹고 쌀밥 먹고
사랑방에 기생 두어
연꽃같이 곱구나.
이처럼 그의 백성에 대한 연민과 그 이상으로 민본주의에 입각한 사회 제 분야의 개혁노력과 그의 청렴한 삶의 실천은 오늘날에도 위정자들과 모든 후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다산은 원래의 의미를 잃고 교주화 되고 변질되어가던 성리학에 대해서는 그 비현실성과 허무성을 비판하고 경학을 중심으로 원래의 태평성대, 이상정치시대의 성리학으로 돌아가자는 성리학의 르네상스시대를 열었으며 자신만의 독자적이고 독특한 세계관, 인물관을 열어 성리학의 마지막 전성기를 만들었다. 또한 반대파이던 노론의 북학과 서학을 받아들였고 중상주의를 아울러 중심적으로 연구, 주장했던 중농주의 실학을 통틀어 집대성했다. 이는 실학이 개방적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발전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여전론(정전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의 저서는 각각 당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위에서 말단까지 부패한 관료들을 척결하고 올바른 관료상을 정립하여 백성을 위한 행정, 정치 시스템을 정비하며, 국가 제 분야에 관한 개혁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위한 그의 연구 성과이자 개혁안이었다. (백성을 위한 길이 국가를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다산이 행한 연구와 업적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고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그의 위대성은 백성을 제일로 생각한 민본주의 사상과 몸소 청렴하고 성실하게 살아간 실천적 자세, 이에 입각한 정치, 경제사상에 대한 학문적 탐구와 저술의 열정, 실학적 개혁사상들의 실현을 위한 노력들, 반대파의 탄압에도 초연한 자세와 반대파의 학문까지도 포용하는 자세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곧 다산이 우리에게 물려준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2. 아쉬운 점
위에서 정리해본 것처럼 다산의 업적과 의의는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그가 피땀흘려 개척한 개혁 연구들이 실제로 19세기 조선시대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정조의 개혁정치와 다산을 비롯한 실학자들의 개혁 움직임은 그들이 세상을 뜨면서 발전되지는 못하고, 오히려 세도정치가와 보수세력들에 의해 사글어들어 세계화로 급변해가던 19세기에 조선왕조가 결국 몰락의 길로 가게된 것이 가장 안타깝다. 그 과정에서 우리민족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아픔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리고 다산의 사상과 개혁은 철저한 실행주의에도 불구하고 실행될 수 없었다. 너무나 이상적인 면도 있었다. 현실은 척족세도라는 찌들어있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산과 정조를 비롯한 실학자들, 개혁가들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실천력은 지금도 우리가 본받아야할 정신이며 19-20세기로 이어지는 아픔의 역사는 되새겨 배우고 경각심을 일깨워야한다고 생각한다. 조사를 하면서 다산에 대한 자료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기도 했고 학자를 조사하니까 우선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평소에 이름은 친숙했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몰랐던 다산 선생에 대해 조금이나마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데 보람을 느끼며 조사를 마치고자 한다.
Ⅳ. 참고문헌
김재영, 「조선의 인물 뒤집어 읽기」, 삼인, 1998
정옥자,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일지사, 1998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홍덕기 「茶山 丁若鏞의 土地改革思想 硏究: 閭田論을 중심으로」, p73~135, 전남대학교, 1990
이기백,「한국사시민강좌」, 일조각, 2002
유봉학, 김동욱, 조성을 공저,「정조시대 화성 신도시의 건설」,백산서당,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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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18
  • 저작시기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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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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