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투쟁과 조선의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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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의열투쟁과 조선의용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및 시대적 상황
1.의열 투쟁의 시대적 배경
2. 의열 투쟁 및 의, 열사의 구분

Ⅱ. 의열 투쟁에 참여한 의,열사
1. 을사조약 이후의 의열사
2. 3.1운동 직후의 의열사

Ⅲ. 의열단체
1. 의열단
2. 한인애국단

Ⅳ. 조선의용대
1. 시대적 상황
2. 조선의용대의 결성과 활동
3. 조선의용대의 건립과정과 성격
4. 조선의용대의 성과와 이후 결과

Ⅴ. 결론

본문내용

극동반파시스트 동맹은 무력화되었고, 지도위원회의 인적 구성은 의용대의 상대적 자주성을 보장하는 힘이 되었다. 이점은 건립될 군사대오가 민혁당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민혁당 전당대회 결의와 합치된다.
앞의 하충한의 지침에서 마지막으로 주목되는 점은 건립될 조선인 군사 대오의 명칭을의용군이 아니라의용대로 한다고 못박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조선인 측의 격한 반대를 받았을 것으로 판단되나 중국은 명분상 규모 면에서 의용대라는 명칭을 고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조선인 군사 대오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조선의용대 건립 당시 하충한은 전 의용대원들에게 주는 훈사(訓詞)에서현재 조선의용대는 비록 전투편제는 아니지만의용대가 건립됨으로써 발전의 1보를 내딛게 되었다고 하여 전투 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건립될 대오가 전투에 참가하는 부대이기보다는 정치선전 활동을 하는 대오로 묶어 두기 위해 전투부대적 성격이 약한 의용대 명칭을 고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에서 볼 때 조선의용대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 첫째는 한중 연대의 구체적인 표현물이었다. 둘째, 조선의용대는 항일 조선인들의 끈질긴 협상의 결과로서 조선민족 항일 단체인 민족전선연맹의 군사 대오였다. 이점은 당연히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의 군대이기를 거부했던 조선인 측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었다. 셋째, 국민당 내 장개석 직계 세력이 내부적으로 통제력을 관철시켜 나갔던 부대였다. 넷째, 부대의 주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정치선전공작이었다.
4. 조선의용대의 성과와 이후 결과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남경이 함락된 뒤, 함락 직전 무한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지역에서 최초로 조직됐던 군사조직이었다. 이들의 근본적인 목표는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벌일 무장부대를 결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부족하고, 전선이 내륙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그들이 펼 수 있었던 활동방향으로 우선 최전방에서 대적공작을 펼칠 수 있는 공작대오를 형성하고 장차 전투부대를 조직하기 위해 조선인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을 펼쳤다.
조선의용대가 성립되자마자 무한방어전에 투입된 이래, 조선의용대는 대적선전공작에 힘을 기울여 제1구대는 호남성 장사지역에서, 제2구대는 하남성과 안휘성에서, 제3구대는 호남성 일부와 강서성절강성복건성 일대에서 각각 대적선전공작과 전투파괴공작에 나서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대적선전공작은 가장 빛나는 성과를 올린 부분인데, 일본군에게는 반전의식을 전파하는 것이고 중국군에게는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공작이었다. 진지선전대와 유격선전대를 구성하고, 갖가지 독창적인 전술을 개발하여 활약하였다. 투항자를 유도하고, 포로를 교육시켜 다시 대적선전공작에 나서게 하였고, 중국군에게도 이를 교육시켜 대적선전부대를 특별히 조직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대적선전공작만으로 진행되는 활동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본래의 목표, 즉 무장부대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인이 늘어나고 있는 화북지역에 관심을 표명하면서 1940년부터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들이 1941년 겨울에 연안으로 이동함으로써 중경에 자리 잡은 조선의용대 본부의 지휘 범주에서 이탈했지만, 조선인의 독자적인 무장부대, 즉조선혁명군의 결성이라는 목표는 변함없었다. 그러나 대다수 인원의 화북진출은 결국 조선의용대가 경쟁세력으로 상정하고 있던 광복군에 흡수통합되는 현실을 가져다주었다.
Ⅴ. 결론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1910년의 경술국치에 이르는 동안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위기적 상황 속에서 우리의 의열사는 일제의 침략에 대한 여러 형태의 저항을 계속하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세론을 부러 일으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지만, 한국침략의 우너흉을 총살하고 민족반역자를 응징하는 등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저항의식은 1910년의 경술국치에 의한 국권의 완전상실에 즈음하여 민족해방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의열사에 의한 민족항쟁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분수령으로 하면서 새로운 독립투쟁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로부터 전개되는 의열투쟁은 보다 조직적은 투쟁으로 화하였고 또한 사회운동과 연결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나타났다. 그중 가장 주목되는 비밀결사적 조직을통한 의열투쟁을 비롯한 지속적인 적극투쟁을 전개하였고 또한 투쟁의 방법도 다양해졌다. 그 중에서도 1920년대에 있어서는 의열단에 의한 의열투쟁이 격렬하였고, 1930년대는 한인애국단에 의한 의열투쟁 또한 항일민족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한편 한국독립운동사에서 31독립운동은 이 후의 의열투쟁에 있어서도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독립운동이었다. 새로운 시대 사조의 영향으로 의열투쟁의 양상도 다양해졌고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로부터 1945년의 민족해방까지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혁신적 민족주의노선을 표방하였고 한인애국단은 민족주의보수파의 노선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는 모두 항일투쟁을 통한 독립의 쟁취라는 점에서 공통된 토쟁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의열투쟁에 있어서 위의 두 단체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큰 공헌을 남겼다.
의사열사들은 자신의 영화와 안락은 물론이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대의 앞에 흔들림 없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의열 투쟁은 어떤 한편으로 봐서는 테러행위라고 규정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일제침략과 한일합방이라는 시대상황에서 그들이 느꼈을 울분과 치욕을 이해하고, 어떤 부분적인 보복이나 개인 말살이 아닌 우리나라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일제의 침략 야욕을 응징했던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다. 의사열사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Ⅵ. 참고문헌
강만길 외, 1994,「한국사 16」한길사
강만길, 1994,「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 화평사
염인호, 1999, [특집]조선의용대의 창설과 한중 연대,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집(1999.11), 한국근현대사학회
김희갑, 1999 [특집]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전략,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1집(1999.11), 한국근현대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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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9.25
  • 저작시기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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