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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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남강 이승훈의 민족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남강 이승훈, 그는 누구인가
ⅰ) 3.1 운동을 전후한 남강의 활동
ⅱ) 저자 소개

Ⅲ. 비평
ⅰ) 남강의 시기별 주요 활동에 대한 해석
ⅱ) 남강의 활동 노선에 대한 평가

Ⅳ. 나오며

#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데 남강 또한 이러한 비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앞에서도 서술하였듯이 3.1운동이후 남강의 민족운동에 대한 성격이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점진적인 개선과 민족적인 함양을 기를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초기와는 다른 방향성 남강이 이러한 비판을 받게 된 원인은 그가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난관에 봉착하자 총독부를 6번이나 방문하였던 것에서도 기인한다고 생각되는데 당시 그는 현실상황을 일본시찰을 통해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구국운동 방법중 최고의 목표인 대학의 설립을 위해서는 총독부와의 타협도 일정량 필요하다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결과를 볼 때에도 남강은 일제에 나약한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오직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택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민립대학의 설립운동은 총독부의 방해로 좌절되고 그 해 여름에 일어난 수해로 인해 구호사업의 선결문제 등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을 띄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는 남강을 잘못 본 것이며 남강은 변절한 적이 없다고 평하려 한다. 남강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뒤 출옥변(出獄辨)으로 “민족의 교육과 산업발전에 헌신할 것”이라 밝혔고 이후의 활동 사항도 민족의 교육을 위한 민립대학 설립운동, 민족신문 동아일보 위탁경영, 자신의 전 재산을 다 바쳐 이루고자 하였던 이상향 건설 등으로 오직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남강이 말년에 이르러 가장 힘쓴 문제는 농촌계몽으로서 일제하에 이상향을 건설하고자 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 김형석씨는 ‘당시 여건상 가장 구체적이고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한 방안으로서 제시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한다고 남강의 행적을 평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강의 활동에 대한 평가를 김연상씨의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남강의 일생은 작은 예수, 곧 청지기적 여기서 이야기하는 청지기적 정신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는’ 것인데 남강은 기업경영, 물산장려운동, 임종할 때까지도 이러한 청지기적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도 인의 삶이었다. 그가 회심하기 이전의 행적은 자신의 부귀공명과 영달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삶이었으며, 동시에 회심 후의 삶은 철저히 민족을 위한 신앙 삶이었던 것이다. 그는 부단히도 민중계몽과 후학양성, 민족의 안위와 번영을 도모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해 세 번씩이나 투옥을 당하면서, 해외로 도피하지도 않고, 국내에서 당당하게 싸워나가다가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감했던 것이다. 그의 삶이야 말로 예수를 닮은 청지기적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Ⅳ. 나오며
남강을 인물평전의 주인공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당시의 많은 민족 운동가들 중에서 특이한 위치에 속해 있으며 기업활동과 구국활동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강은 일생 중 반이상을 차지하는 기업활동을 통해 기업가로서의 신뢰를 생활 원리로 체득하였고, 기독교를 통해 이러한 정신을 종교적 믿음으로 실천했으며, 이와 같은 원리를 민족문제 해결방식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그의 구국운동은 현실적이며, 실천적이며, 오로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친 진정한 민족운동가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남강이 도산을 만나 사상적 전환을 하게 되면서 그의 초기 활동은 애국계몽운동이 독립을 쟁취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인식하여 개화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반면 3.1운동 이후, 일본을 시찰하면서 현실적 조선의 상황을 인지하게 되고 그의 활동은 당시의 사회 상황과 현실 여건을 인정하면서 민족역량의 함양을 주장하였던 민족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남강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정신사상적 변화는 두 번 일어나게 되는데 첫 번째는 보부상으로 일하면서 자신이 양반화 되는 것이었고, 둘째는 도산을 만난 이후 민족이 양반화 되는 것이었다. 남강의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인 오산학교 설립은 자신의 재산을 몽땅 털어 세운 것이며 이는 곧 민족양반론을 교육구국으로서 시행한 실천적 면모를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남강은 기독교를 수용하여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켰고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룬 이후에 교회의 방향이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피안주의적 자세를 취하자 이를 비판하고 조선적 기독교를 주장하여 민족 독립을 강하게 염원하였다. 이처럼 남강의 기독교에 대한 자세에서도 그의 면모를 확인 할 수 있다.
남강 선생은 무엇이나 옳다고 생각한 것이면 곧 실천, 실행하는 인물이었고, 한경직씨의 회고에서 남강 선생의 사상을 보다 잘 확인 할 수 있는데 남강선생이 말하기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가 망한지 여러 해 되지 않았니, 독립될 희망이 점점 희미해 지니까 소위 애국지사란 자들의 마음이 점점 식어가는 구나! 너희들 들어라, 나 이승훈이는 죽을 때까지 조선사람으로 살다가 조선사람으로 죽을게야!’ 회고. 「내가 본 남강 선생」- 한경직(영락교회 원로목사, 남강문화재단 이사장)
라고 하셨다고 한다. 이를 통해 남강 선생의 나라를 향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계속하여 교육운동을 펼침으로서 민중을 깨우쳐 자력으로 독립을 구하고자 하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남강선생의 탄식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이자 민족운동가들의 분위기가 어떠하였는지도 엿볼 수 있다.
이제는 시대가 많이 바뀌어 대중들이 시대의 주역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정보화 시대가 도래하여 남강선생이 이루고자 했던 민족의 양반화가 대중의 시대로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에는 월드컵이 이슈가 되어 한국의 축구대표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것이 곧 애국의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이 되었는데 순수한 애국이 아니라 한 때 반짝하는 냄비근성으로 응원 뒤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는 태극기를 보면서 남강 이승훈 선생의 애국정신과 민족정신이 새삼 절실히 그리워졌다.
※ 참고문헌
김연상 「南岡 李昇薰의 基督敎的 企業經營 理念과 活動에 관한 硏究」
김형석 「남강 이승훈과 민족운동」
서굉일 「3.1정신과 남강 이승훈의 민주정신」
한경직 「내가 본 남강 선생 -회고」
함석헌 「南岡 李昇薰 先生」
엄영식 「남강 이승훈의 생애와 교육운동」
김승태 「남강 이승훈의 신앙행적에 관한 몇가지 문제」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소식 제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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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06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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