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사]성리학과 한국교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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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교육사]성리학과 한국교육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붕당과 교육
(1). 성리학과 교육
(2). 붕당의 의미
(3). 붕당의 정치와 교육
2. 서경덕과 주리론적 성리학
(1). 서경덕의 생애
(2). 서경덕의 기철학(氣哲學)
3. 이언적과 주기론적 성리학
(1). 생애
(2). 주돈이의 『태극도설』
(3). 태극논쟁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우연히 알게된 조한보는 회제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첫째논쟁) ㉮무극이 태극을 유무로 이해할 때 무라고 정의하더라도 없는 것이 아니어서 마음속에 신령스러운 근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유라고 정의하더라도 정말 있는 것이 아니어서 마침내 점점 줄어들어 없어지게 된다.㉯감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본마음을 경으로 바로잡아 본체를 체득하고 무극의 참세상에서 마음을 노닐게 하며 빈 듯 하면서도 신령스러운 본체를 내 마음의 주체로 삼는다. 따라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통한 형이상학적 공부만이 필요할 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사물의 이치는 같다고 하면서 理의 상하구분이 없음을 주장하였다.
이언적은 이러한 조한보의 견해에 대해서 ㉮와 같은 견해는 노자가 무에서 나와 유로 들어간다고 한 것이나 부처가 말한 공(空)과 같다. 기(氣)의 변화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수 있겠지만 理 이치는 지극히 높고 묘하면서 우리주변의 만물에 구체적 원리로 들어있다. 또한 그 理는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으면서 만물이 다 없어지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영원 불면의 존재이다. 따라서 적멸한다고 할수 없다.
㉯하늘의 이치가 사람이 하는 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형이하학적인 것을 토대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가는 下學而上達공부가 마땅하다.
㉰모든 사물의 이치가 같다는 견해는 옳지 못하다. 예를 들어 말, 소, 닭, 개를 보면 그 가가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에 맡은 일이 달라지는 것이다.
두 번째 논쟁은 망기당이 이언적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무극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던 주장에서 마을을 노닐게 한다는 표현을 빼버렸으며, 아울러 ‘본체는 적멸’이라고 했던 데서도 멸자를 뺀답서를 보내왔으나 결국 자신의 사상에 있어서 큰 변화는 없었으며 회제역시 ‘이단‘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까지 조한보의 親佛家的 親道家的 성향과 그의 上達天理의 공부방법을 비판했다.
이후 세 번째 논쟁부터는 수양에 관한 문제가 그 주가 되었는데, 敬을 통해서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밝은 明을 돌아보면 내 마음이 굳게 안정되게 된다는 망기당의 주장에 대해서 회제는 현실적인 것과 실천의 문제에 대한 도외시를 비판하였으며, 조한보가 첫 번째 논쟁에서 ‘적멸(寂滅)‘이라는 주장을 한 이유를 뭇 사람들이 헛된 환형을 참된 현실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하자 형체와 이치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는 하늘의 지극한 이치가 함께 깃들어 있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조한보가 비판한 회제의 下學을 통한 상달의 수양방법론에 대해서 공자 역시 하학을 통하여 공부하였음을 들어서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였다. 특히 세 번째 논쟁의 말미에서 회제는 망기당의 견해를 불교와 일치하는 것으로 못박고 그의 견해를 부정하였다.
네 번째 논쟁에서 망기당은 이언적의 견해를 받아들여 적멸이란 표현을 빼버렸고 상달천리아래 하학인사라는 구절을 덧붙였다. 그러나 망기당이 자신의 견해를 모두 꺽은 것은 아니어서 “나와 모든 것은 같다“(모든사물의 이치는 같다), 敬을 주로 삼아 마을을 보존하는 공부를 해야한다.”, “공부순서는 본체를 먼저 확립한 뒤에 하학인사(下學人事)해야한다.”는 견해는 일관했다.
이언적은 조한보의 이러한 주장을 “피부를 빼놓고 뼈만 가리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만물이 같은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나 모든 사물이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경을 주로 삼아 내면을 한결같이 하고 이를 바탕으로 밖을 제어하는 것이며 밖을 가지런히 해서 다시 내면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팎이 모두 이루어지게 되니 어느 한쪽의 공부도 그만 둘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Ⅲ. 결론
조선시대 붕당이 정치에 미쳤던 영향은 매우 컸었다. 하지만 그 때의 붕당은 지금의 정치적 목적의 당들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갖고 있었다. 붕당은 단지 정치적 목적을 갖고서 단합했던 단체가 아니다. 붕당은 자신들의 학풍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학문적 교류를 통해 자신들의 학문에 정진하고 자신들의 명분을 내새워 정치를 올바른 길로 끌어 나가려는 모임인 것이다. 도한 서원을 통해 후진을 양성해 자신들 학풍의 전승을 용이하게 만드는 단체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의 올바른 당쟁은 필요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쟁을 통해 정치적 권력자들이 한 곳에 편집되어 세도를 하게하는 일을 방지 할 수 있고 진정한 왕도정치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붕당을 이루게 만들었던 성리학적 사상의 차이인 주기론과 주리론의 차이는 이언적과 서경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주리론과 주기론의의 대가로 처음으로 주리론과 주기론을 주장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덕의 기철학(氣哲學)과 이언적의 무극태극(無極太極)논쟁을 통해 그들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학문은 훗날 퇴계와 율곡을 통해 더욱더 발전된 모습의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나타난다. 퇴계와 율곡은 조선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두 인물로 그들의 학문적 성격을 바탕으로 붕당이 형성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퇴계와 율곡의 사상 조차도 서경덕과 이언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그들의 학문이 얼마나 위대한 사상이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성리학과 그 성리학의 사상적 차이 때문에 발생된 붕당, 그리고 그 성리학과 붕당과 빼놓을 수 없는 교육을 연구하면서 조선시대 역시 교육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붕당이 발생하게된 원인인 주리론과 주기론의 대립은 계속 후학을 양성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이는 후학양성 즉 교육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조선시대의 교육은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Ⅳ. 참고문헌
한국철학사상연구회編, 『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 서울: 예문서원, 1995
한국철학사상연구회編, 『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서울, 1995
이완재, 「無極太極論辯에 관하여」, 『韓國思想論文選集』62. 불함문화사, 1999
이문원, 『한국의 교육사상가』, 문음사, 서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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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23
  • 저작시기20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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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6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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