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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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선거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선거의 의의

Ⅱ. 한국 선거의 역사
1) 최초의 민간인 선거
2) 최초의 총선거 실시
3) 민주주의의 기반 취약
4) 잘못된 출발
5) 군부정권의 왜곡정치
6) 정치부패의 연속
7) 새로운 질서의 기반 구축

Ⅲ. 대통령 선거
1. 1948년 ― 초대 대통령․부통령선거
2. 1952년 ―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선거
3. 1956년 ― 제3대 대통령 및 제4대 부통령선거
4. 1960년 ―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선거 (무효된 선거)
5. 1960년 ― 제4대 대통령선거
6. 1963년 ― 제5대 대통령선거
7. 1967년 ― 제6대 대통령선거
8. 1971년 ― 제7대 대통령선거
9. 1972년 ― 제8대 대통령선거
10. 1978년 ― 제9대 대통령선거
11. 1979년 ― 제10대 대통령선거
12. 1980년 ― 제11대 대통령선거
13. 1981년 ― 제12대 대통령선거
14. 1987년 ― 제13대 대통령선거
15. 1992년 ― 제14대 대통령선거
16. 1997년 ― 제15대 대통령선거

Ⅳ. 결론

본문내용

성하였다. 이것은 결국 6공화국에서는 5공화국 전두환 정권에 비하여 직접적인 고문, 구타, 불법연행과 구금 등은 감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위해 필수적인 근본으로부터의 개혁은 좌초되었고, 공안사건은 급격하게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5. 1992년 ― 제14대 대통령선거
▷ 선 거 일 : 1992. 12. 18
▷ 선출방법 :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최다수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
▷ 선거양상 및 결과
이번 선거는 30여년간 한국정치에 뿌리내렸던 군부세력이 정권의 중심에서 벗어나고 민주세력 후보끼리의 대결이었다.
3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 민주자유당의 후보로 나선 김영삼과 제1야당의 후보인 김대중의 경쟁틀속에 현대그룹의 정주영과 홀로서기를 시도해 온 박찬종 및 이종찬이 가세했다.
심한 지역대결 구도속에서 총선거인수 29,422,658인중 81.9%에 해당하는 24,095,170인이 투표에 참여하였고, 여당 후보인 김영삼이 유효투표자수의 42%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김영삼 정권-
김영삼 정권은 본질적으로 노태우 정권의 후원에 힘입어 출범한 정권일 뿐 아니라 3당 합당으로 인하여 태어난 민자당의 본질적 성격에서 유래하는 내재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은 본질적으로 호남지역을 포위하는 지역패권연합에 의하여 정권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김영삼 정권은 초기부터 민주화와 개혁을 표방하였음에도 김영삼 대통령 본인의 통치스타일에서 유래하는 장기적인 비전의 부재와 독단적 성격은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며 일관된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했고, 초기의 의욕적인 개혁드라이브는 결국 표적사정과 인기영합적인 즉흥통치로 표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결국 말기에 이르러서는 보수회귀와 함께 외환위기를 불러온 참담한 경제실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김영삼 정권은 집권 이후 1993년 초반에 이르는 초기단계에 있어서는 군개혁, 고위공직자의 재산공개, 금융실명제의 실시 등을 전격적으로 단행하고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지방자치법 등 3개 개혁입법을 단행함으로써 제도개혁을 시도하였다(제1국면).
그러나 이와 같은 장기적인 비전 없이 감행된 개혁과 사정에 대하여 공무원을 포함한 보수 기득권세력은 공공연히 또는 암묵적인 형태로 반개혁 사보타지를 전개하였고, 1993년 말 우르과이라운드 협상문제를 계기로 국가경쟁력 강화의 논리와 세계화의 논리가 개혁논리를 압도하여 보수주의로 회귀함으로써 신공안정국을 조성하기에 이르렀다(제2국면).
그 후 다시 1995. 6. 27. 지방자치단체 선거에서 집권여당이 패배하자 이를 돌파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역사바로세우기를 천명하여 1995. 12. 21.에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정권출범 초기에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는 태도를 취했던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씨를 구속하기에 이르렀다(제3국면).
그리고 마지막에는 1996. 4. 11. 총선 이후 8월의 한총련 연대농성사태와 그해 9월의 북한잠수함침투사건을 계기로 안보논리를 앞세워 다시 강력한 보수주의로 회귀하기에 이르렀다(제4국면). 이는 임기말 권력누수를 차단하고 정권 재창출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종단에는 1996년 말 개악된 노동관계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키는 무모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또한 이와 같은 일관성 없이 개혁과 보수의 양극을 왕복하는 통치스타일은 사회 구성세력간의 이질감과 불신을 조장하여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만연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것은 임기 말의 경제위기로 현실화되었다.
16. 1997년 ― 제15대 대통령선거
▷ 선 거 일 : 1997. 12. 18
▷ 선출방법 :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한 최다수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
▷ 선거양상 및 결과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고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은 1995. 6. 27실시된 지방선거의 야당승리를 발판으로 정계에 재 진입하였고, 이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통해 제1야당총재로 복귀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 연합한 제1야당의 김대중과 여당인 한나라당 이회창의 불꽃튀는 경쟁틀속에 한나라당 공천과정에서 탈락한 이인제가 뛰어들어 새로운 변수로 작용되었다.
특히 민주노총의 위원장인 권영길이 후보로 출마하여 노동세력의 결립을 도모하였으며, 그동안 청중동원 등 문제가 많았던 옥외연설회가 옥내연설회로 변경되고 그 횟수도 대폭 축소되었고, 방송연설방송광고 등 언론을 이용한 선거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총선거인수 32,290,416인중 80.7%에 해당하는 26,042,633인이 투표에 참여한 이번 선거는 야당의 김대중후보가 유효투표수의 40.3%를 획득하여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서 한국 민주주의에 새로운 이정표를 그은 선거였다.
Ⅳ. 결론
우리는 제1공화국에서 6공화국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권이 선거 제도의 개정을 통해서 민심을 왜곡하고, 의석 획득을 통해서 권력 욕구를 충족시켜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처럼 대중의 참여가 배제된 가운데에서도 국가 형성, 산업화 그리고 민주화에 이르는 거시적 변화가 이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는 사회의 어떤 이념적, 도덕적 기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단지, 민주주의 그 자체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라면, 피, 땀 흘려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또다시 외부 충격에 쉽게 넘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 그치지 말고, 우리나라 민주주의 현실을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서, 열정적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참고자료>
-참고서적
한국의 선거 / 이남영 / 푸른길 / 2003
선거와 선거제도 / 김광수 / 박영사 / 2004
『한국의 정치사회무엇이 문제인가』 / 김대환 / 한빛 / 2005
『박정희를 넘어서』 / 한국정치연구회 엮음 / 푸른숲 / 2005
『한국의 선거 IV』 / 진영재 편 /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 2006
-인터넷 사이트
중앙 선거관리 위원회 http://www.nec.go.kr/
  • 가격2,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6.11.24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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