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이해] 한국의 영화감독<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명세, 이창동>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영화의이해] 한국의 영화감독<김기덕, 박찬욱, 홍상수, 이명세, 이창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기덕
1) 왜 김기덕인가?
2) 김기덕 필모그래피 & 바이오그래피
3) 김기덕이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 받는 이유

2. 박찬욱
1) 왜 박찬욱인가?
2) 박찬욱에게 복수란?

3. 홍상수
1) 왜 홍상수 인가?
2) 홍상수 필모그래피&바이오그래피
3) 홍상수 영화의 전반적인 특징

4. 이명세
1) 왜 이명세인가?
2) 이명세 필모그래피&바이오그래피

5. 이창동
1) 왜 이창동인가?
2) 이창동 필모그래피 & 바이오그래피

결어

본문내용

수 있다. 하지만 광주가 직접적이고 작위적으로 표현되지 않는가 하는 혹자들의 평가에 그는 "구조로 보면 꼭 광주는 아닙니다. 만약 외국 사람이 보면 영화 구조 속의 한 순간으로 보겠죠. 개인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절망에 빠지는 순간.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교 4학년 때 그런 절망감을 겪어봤는데 아무튼 사람과 사람, 우리 사회에 대한 절망이 평생 자신을 지배할 것이라는 생각들. 어떤 위선과 왜곡을 경험한 사회가 문제가 없을 수 없겠죠. 특히 한국사회에서는요. 젊은 사람들은 광주를 개념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 20년을 살아온 한 사람으로 의인화해서 보고자 했던 겁니다"며 의식적으로 광주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았다며, 다른 각도로 영화를 봐주길 원했다.
「박하사탕」의 마지막 단락인 '소풍-1979년 가을'에서 그는 자신이 자살하게 될 장소에서 첫사랑 순임을 만나고, 강 한 켠에서 눈부신 하늘을 바라보는 영호의 순수한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영호의 그 눈빛에서 희망이란 걸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희망이란 것을 의도하지 않고 단지 희망이란 것을 전제로 한 것이죠. 희망이란 것을 통해 젊은 관객들이 다시 시작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시간 역순은 그래서 관객에 의해서 다시 순환하게 되고, 영화에서의 시간여행은 끝났지만 관객들은 다시 각자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거죠."
"지금은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호가 기차 앞에서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토해내는 말이다. 그래 우리는 영화를 보고 각자의 인생의 한 지점을 되새기며, 그 지점을 향해 다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창동. 아마 그는 계속적으로 삶의 돌아갈 지점들을 짚어낼 것이다.
박하사탕같은 그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세요" 그는 특유의 그 미소로 "그래요, 지금은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 합니다"며 담배연기 한 모금 길게 뱉어낸다. 돌아오는 길,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서 누군가에게 박하사탕 선물하고픈 생각이 든다.
2) 이창동 필모그래피 & 바이오그래피
그는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계신 안동이 고향이긴 하지만 그는 줄곧 대구에서 성장하였다. 경북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그는 6년을 교단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에 매달려 등단을 했다. 좌익이었던 이창동 아버지 때문에 이창동은 어릴 때부터 많은 고통을 견디고 자라왔다. 그의 고통스런 심장에 들어차 나오지 않는 말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차곡차곡 쌓이게 되고, 드디어 그는 그런 이야기를 모아 소설을 쓰게 된다. 소위 글쟁이로써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고통이다'라고 말해도 될 듯싶게, 그의 글쓰기의 근저에는 삶에 대한 비애 혹은 지독한 불신이 깔려 있었다.
그 후 그는 사범대 국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 당시 사범대학은 문리대보다 취직이 쉬웠고, 이유야 어떻든 그도 그러한 현실에 맞게 교단에 서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 이듬해 81년부터 87년까지 지방에서 1년, 서울에서 5년 정도 교직생활을 하면서도 그에게 교직생활은 솔직히 적성에 맞지 않고 교직생활동안 그는 왕성한 창작품을 쏟아내게 된다. 교직생활 중간인 83년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면서 등단을 하고 그 이후에 여러 작품을 발표, 문단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80년대 대표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는 드디어 불혹의 나이에 충무로에 당도했다. 마흔이란 말 그대로 미망이나 유혹이 없는 나이라고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마흔에 스스로 유혹의 덫을 짜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993년 평소 알고 지내던 박광수 감독의 권유로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 작가와 조감독으로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영화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6년 그는 문성근, 명계남, 여균동과 만나 '이스트필름'을 만들었다. '이스트필름'의 창립 작품이자, 그가 메가폰을 잡고 만든 첫 작품인 「초록물고기」(1997)는 작품성이나 흥행성 모두에서 호평을 받으며 90년대 한국영화의 새 장을 열어놓았다. 제33회 백상예술대상 작품상/신인감독상/각본상, 제17회 영화평론가상 최우수 작품상/신인감독상, 한국예술평론가 협회 '영화부문 97 최우수 예술인상', 제17회 청룡영화상 최우수 작품상/감독상, 제16회 밴쿠버국제영화제 용호상 등 「초록물고기」는 각종 영화제의 상이란 상을 모두 휩쓸면서 그 저력을 입증시켰다.
한국 영화 최초의 부산국제영화제(1999) 개막작 「박하사탕」. 실로 2000년 한국 영화의 문을 연 작품인 「박하사탕」은 그 베일을 들추어내기 전부터 그야말로 관심 그 자체였다. 영화 오발탄의 위치와 맞먹는 리얼리즘을 가지고 있다라는 평가에서부터 우리 영화사에 남을 몇 작품으로 꼽힌다는 찬사까지 「박하사탕」의 신고식은 대단했다.
결어
작년 5월 김기덕 감독은 신작<활>을 단관 개봉했다. <사마리아>와 <빈집>으로 각기 베를린과 베니스 영화제에서 수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배급망을 잡기 어려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김기덕 영화는 어렵고 무겁다는 세간의 평이 결정적이었다. 관객들이 원하는 웃고 즐기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해외 평단에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가장 큰 고민은 “다음 영화를 찍을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흥행이 될 수 있을까”라고 털어놓곤 했다. 최근 배급사의 뛰어난 마케팅(?)으로 <친절한 금자씨>로 흥행에 성공했던 박찬욱 감독 역시 그의 최고작이라고 평가받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 흥행 참패를 맛본 적이 있었다. <박하사탕> <오아시스>등의 영화로 묵직한 주제의식을 보였던 이창동 또한 그 명성에 비해 관객 동원에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실제로 갈수록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은 높아 가지만 그 높아지는 위상만큼 한국영화시장이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지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최근 개봉했던 <인 디스 월드>나 <취한 말들의 시간><아무도 모른다> 등 해외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진지한 영화들이 개봉관조차 몇 개 잡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예는 허다하기 때문이다.
  • 가격1,2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6.11.29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7876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