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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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제주 4.3항쟁

2. 여순사건

본문내용

계 청년들의 비전투 민간인들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미평전투 다음날 10월 25일 진압군은 박격포 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여수읍내 중심가로 전날보다는 쉽게 진입했다. 본격적인 진압군의 공격은 10월 26일 전개된다. 진압군은 여수에 진격하자마자 무차별 사격과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LST, L4항공기 등 육해공의 입체적인 진압작전에도 불구하고 여수시내의 반란군의 저항도 거세었다. 반란군의 거센 저항에 따라 밤이 되자 진압군은 소탕전을 중지하고 본부를 서국민학교에 두고 지역경계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진압군과 반란군의 치열한 전투를 피해 피난을 떠나려는 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10월 26일과 27일에는 서시장과 충무동 시민극장 주변에서 불이나 밤새 여수시내는 불구덩이 같았다. 시가지 화재의 발화원인은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화재의 주체에 대해 진압군인가, 아니면 반란군인가의 논란이 많았다. 이런한 논란은 장흥 보림사, 구례 화엄사, 곡성 태안사 같은 전라남도 일대의 문화재를 누가 방화하였는지에 대한 원인규명과도 연결되어 있다. 어쨌든 시가지 화재로 건물들이 대부분 타버림에 따라 진압군은 더욱 용이하게 시내점령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10월 27일 새벽, 12량의 장갑차를 선두로 한 진압군은 여수읍 한복판에 위치한 반란군의 본부를 공격했다. 당시 반란군의 본부는 읍사무소 자리에 위치했는데 주로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저항을 했다. 백인엽, 김종원이 중심이 된 진압부대는 27일 오후 3시쯤 여수 시내를 완전히 점령하고 오후 6시쯤에는 소탕적마저 완료되어 여순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러나,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순지역이 재탈환되자 이승만 정부와 미군정 당국이 계엄령 아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반란군 및 이에 가담한 부역자의 색출이었다. 그러나 반란군 및 좌익지도자는 대부분 산악지대로 도주했기 때문에 대부분 소수의 반란군 잔류자 및 부역자가 남아있을 뿐이다. 5연대장이던 '백두산 호랑이' 라는 불리웠던 김종원은 자신이 주둔하던 중앙국민학교에서 혐의자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면서 제멋대로 일본도로 참수를 자행했다. 당시의 여수 상황을 「자유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항구도시인 여수는 아직도 온통 공포와 보복테퍼에 휩싸여 잿더미를 이루고 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아이들과 가족들, 그리고 가재도구를 찾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목적도 없으면서 페허 위를 방황하고 있다. 시내 어디를 가나 핏자국과 시체가 가득하다. 경찰서와 군사재판소는 재판을 기다리는 반란군 용의자로 가득 차 있다. 시내 중심가에는 상점들의 거의 철시해 있고, 문을 연 상점도 제대로 장사를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여수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일이라고는 증명서, 통행증, 그리고 기타 증빙서류를 발급하는 것 뿐이다. 11월 4일 현재 1,200여 명 이상의 사망자가 확인되었고, 당국의 조사가 끝나면 사망자와 실종자가 휠씬 더 늘어날 것이다."
<여순사건의 피해상황>
1) 여수지구
사망: 1,300여명 중상자: 1,150명 행방불명: 3,500명
소실파괴된 가옥: 1,548동 이재민: 9,800여명
2) 순천지구
사망자: 1,135명 중상: 103명 행방불명: 818명 전파가옥: 13동
3) 진압군의 작전결과
유기시체(즉결처분): 392명 포로: 1,512명 M1소총: 952정 38식소총:
692정 99식소총: 863정 박격포: 14문
4) 진압군측 피해
전사장교: 9명 전사사병: 42명 부상: 118명
5) 처벌
11월 1일 사건관련자 89명 사형집행
11월 7일 광주군법재판 28명 사형언도
11월 13~14일 순천군법재판 102명 사형언도
11월 6일 고등군법재판 35명 사형언도
<여순사건 -그 후>
여순사건의 여파는 전남지방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철수 연기 및 군원증강, '제14연대 반란군'의 지리산유격대 구축 및 북한정권의 게릴라 남파, 이에 따른 남한 내 치안의 불안 및 남북갈등의 첨예화, 그리고 숙군, 청년단체의 통폐합 및 국대 증강, 학도호국단 창설, 국가보안법 등과 같은 국가제도 및 기구 그리고 사회구조에 미친 영향 또한 엄청난 것이다. 이와 함께 국내의 중도 우익세력 또한 정치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해가면서 제 1공화국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명실상부한 반공국가로 탈바꿈해 나간다. 또한 전남 지역에서도 반란군 진압을 위한 군경의 지리산 토벌작전이 계속되면서 민간인들의 생활은 반사적으로 더욱 흉흉해지고 민생의 위협도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져 갔다. 이렇듯 여순 반란은 저항형태의 한 전환점이 되었고, 한국전쟁 이전의 마지막 대중투쟁이었다.
<여순사건의 의의>
여순 반란은 미군의 비호를 받는 이승만 정부를 파멸의 늪으로 몰아넣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첫째, 여순 봉기의 파급적 영향은 이승만 정부를 지탱해주는 보루로서의 억압적 군대내부에 광범위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둘째, 여순 봉기에 참가한 군 장병들이 대거 유격대로 전환함으로써 27구국투쟁 이후 야산대의 형태로 펼쳐지던 무력항쟁과 결합하여 본격적인 유격전의 불길을 당기었다. 이로써 여순 봉기는 제주도에서 벌이지고 있던 무력 항쟁의 불길을 전 남한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교량 역할을 하였다. 여순 반란은 지역적 맥락을 넘어서서 남한민중과 미 제국주의와의 정면대결이라는데 의의를 가진다. 여순사건은 역사적으로 민중의 이상과 지역민중의 이상을 총체적으로 결합시킨 항쟁이었다. 이와 같이 민중적 성격을 가졌기에 그 동안 지배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은폐되었고, 또한 민족자주의 길을 걸었기에 외세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해방 전후사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여순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한 재조명 작업으로 제주도의 '43폭동'을 '43항쟁' 으로 새롭게 평가하고, 거창이나 남원 등에서 일어났던 국군과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여순사건의 원인과 배경, 결과에 대한 연구는 현대사를 전공하는 역사학자들의 몫이다.
여수 반란군 진압
순천근교에서 희생된 의용군과 경찰 시신들
애기를 업고 남편 시신을 찾고 있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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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13
  • 저작시기2006.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2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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