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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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몽고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1.서론

2.본론
1)몽고침략의 원인
2)대몽항쟁
①대몽항쟁 초기의 농민항쟁
②삼별초의 항쟁
③고려 후기 농민항쟁의 의미
④강화천도와 무신정권의 붕괴
3)공민왕의 개혁
4)대몽항쟁의 결과
①사대부=성리학자의 성장
②성리학의 수용과 분화
③불교계의 변화
④역사편찬
⑤문학과 예술
⑥과학기술과 금속활자 발명

3.결론

4.참고문헌

본문내용

물게 하고 드디어 그 방법을 배웠다. 그 후 정부에 건의하여 우왕 3년(1377)에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각종 화약무기를 제조했다. 그 중에 화포와 화통은 위력이 대단하여 그는 이를 함선에 장비하여 금강입구와 남해 관음포 등지에서 왜구토벌에 큰 성과를 올렸다.
과학기술상의 또 하나의 개가는 목화의 도입과 그 직조기술의 발명으로서 이는 의류혁명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1329~1398)은 공민왕 13년(1364) 돌아오는 길에 중국 강남지방에서 얻어 가지고 온 목화씨를 경상도 단성에 사는 장인 정천익에게 주어 재배를 성공시켰다.
정천익은 기후와 풍토가 다른 우리나라에서 고심어린 노력 끝에 목화재배에 성공하고, 중국 승려로부터 씨를 뽑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의 기술을 배워 의류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그 후 국가에서는 정책적으로 삼남일대에 보급했다. 이로써 거친 삼베와 비싼 명주와 모시밖에 모르던 시대에 대량생산이 가능한 무명이 의류가 주류가 되고, 또 화폐로도 이용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편, 농업기술에 있어서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고려초기에는 농업기술이 미숙하여 평지의 땅은 매년 연작이 가능했지만, 산전은 1년이나 2년을 쉬었다가 경작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에 이르러 산전이 적극적으로 개간되고, 특히 남부지방에서는 신흥사대부들의 노력에 의해 비료주는 시비법이 개선되고, 냇물을 막아 물을 저수하는 천방, 혹은 보가 많이 축조되었다. 그리고 소를 이용하여 땅을 깊게 가는 심경법 등도 나타났다. 이런 이유로 휴한지가 줄어들고 연작지가 전보다 늘어났으며 농업생산력이 높아지게 되었다.
고려 말 농업발달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는 이암(1297~1364)을 들 수 있다. 그는 서예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는 충숙왕~충정왕 시기에 원나라에 가서 돌아오는 길에 《농상집요》라는 농서를 들여왔는데, 강시가 이색의 후서를 받아 공민왕 21년(1372)에 이를 합천에서 간행하여 널리 보급했다.
고려말기의 잇단 전쟁과정에서 흉년과 질병이 만연하자 민족의학이 발달했다. 고종 23년(1236)에 《대장경》을 만들 때 함께 간행한 《향약구급방》은 구하기 쉬운 우리나라 약초로 병을 치료하는 의학서로서 유명하고,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의서이기도 하다.
금속활자의 발명도 고려말기 과학기술 발전의 큰 성과의 하나이다. 이미 무신집권시대에 《대장경》조판을 통해 목판인쇄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던 고려는 원간섭기에 이르러 지식정보의 양이 폭주하고, 향촌에서 사대부들이 성장하면서 독서수요층이 증가하자, 이에 부응하기 위해 많은 종류의 책을 찍어낼 수 있는 방법으로 금속활자를 창안하게 되었다. 목판은 한 가지 책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데는 도움을 주지만, 다종다양한 책을 간행하는 데에는 비용이 너무나 많이 들었다. 이에 반해 활자는 한번 만들면 이를 조합시켜 여러 종류의 책을 쉽게 찍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 활자는 11세기에 북송의 필승이 처음으로 발명했다고 하나 그것은 흙으로 만든 것이어서 실용화되지 못했다.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은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한 《직지심체요절》로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는 숙종 2년(1097)부터 주전도감에서 동전을 주조하던 기술의 축적이 있었으므로 금속활자의 주조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공양왕 4년(1392)에는 국가에서 서적원을 설치하고 활자의 주조와 인쇄를 맡게 했는데, 조선왕조에 들어와 그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려에서 발명한 금속활자는 1454년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42행성서》를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보다 220년이나 앞서고, 현존하는 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77년이 앞선다. 고려는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를 생산했는데, 금속활자까지 앞서서 교육과 관련되는 기술분야에서는 세계 첨단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결론-위기는 곧 기회
40년간이란 세월동안 항쟁하였지만 강화하게 된 것이 너무 씁쓸하다. 이 시대에 몽고와의 전쟁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가 많이 파괴되지도, 국토가 황폐화 되지도, 부마국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록 고려는 몽고의 침입과 원 간섭기에 들어갔다고 하나 그 위기에서 벗어나 자립하려는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다른 나라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제 성장과 발달을 이룩하였고, 농민들과 평민들의 의식이 깨어져 있었다.
정부에서 먼저 나서지 않고 있을 때 농민들과 평민들은 먼저 나서서 대몽항쟁에 가담하였고, 나라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맞서고 싸웠다. 전쟁이 났을 때 사람들은 더 똘똘 뭉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전쟁을 통해서 고려는 하나로 뭉쳐졌고, 결국 전쟁에서 이기지는 못하였지만 당하지 만은 않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 모든 사람들은 빠져나갈 궁리를 찾는다. 이 시기의 지도자들이 농민들을 수탈할 생각과 명예를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농민들과 함께 합심하고 농민들을 위하는 정책을 폈더라면 고려는 오랜 기간 종속되고 몽고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원 간섭기에 들어가지도 않는 자유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지고 사대라는 중국의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많은 발명품과 문화를 발명하였기에 나라를 발전하게 하는 밑거름을 가지게 되었다.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인하여 동전을 주조할 수 있었기에 단거리의 교역이 아닌 원거리의 교역이 일어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 기술이 우수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전쟁을 통해서 많은 것이 수탈되고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러한 것을 기회로 삼아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라 생각하며 다시는 답습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박기현,『손에 잡히는 고려 이야기』, 늘푸른 소나무, 2000년
2.한국사 편집위원회,『한국사5』, 한길사, 1994년
3.한국사 편집위원회,『한국사6』, 한길사, 1994년
4.한영우,『다시 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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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18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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