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의 생애,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다산 정약용 교육사상,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다산 정약용의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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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의 생애,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다산 정약용 교육사상,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다산 정약용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다산 정약용의 생애

Ⅱ.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Ⅲ.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Ⅳ.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Ⅴ.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1. 오학론과 불가독설
1) 오학론
2) 불가독설
2. 교육사상
1) 효 제 자
2) 국학
3) 기예론
4) 아학편

Ⅵ.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
1. 경세유표의 구성
2. 경세유표에 담긴 개혁사상
3. 경세유표의 시대정신과 그 교훈

Ⅶ. 다산 정약용의 도덕적 자율성
1. 천사상의 변천
2. 상제천의 개념
3. 천의 윤리적 기능

Ⅷ. 다산 정약용의 문학 연보

Ⅸ. 다산 정약용의 현대적 의의

본문내용

가을에 용문산(龍門山)을 유람하며 산택간(山澤間)을 소요하다. 겨울에 옹산(翁山) 윤서유(尹書有)의 묘지명을 짓다. 5월에 문학론인 위이인영증언(爲李仁榮贈言)을 쓰다. 시 천우기권(穿牛紀卷)의 화두시십이수(和杜詩十二首) 등 20편 47수를 짓다.
60세, 1821년(純祖 21, 辛巳)
봄에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가 이루어지다. 9월에 중형(仲兄) 진사(進士) 약전(若銓)의 喪을 당하다. 백형(伯兄)의 묘지명(墓地銘)을 撰하다. 겨울에 참의(參議) 남고(南皐) 윤지범(尹持範)의 묘지명을 찬하다. 시 채화정시초(菜花亭詩草), 경의시(經義詩) 등 21편 51수를 짓다.
61세, 1822년(純祖 22, 壬午)
회갑(回甲)을 맞아 자찬묘지명(自撰墓地銘) 광중본(壙中本)과 집중본(集中本)을 撰하다. 송종(送終)(葬禮)에 관한 의절(儀節)을 첩자(帖子)로 만들어 유명(遺命)을 써두다. 지평(持平) 윤지눌(尹持訥)과 죽란시사(竹欄詩社) 동인(同人)이었단 장령(掌令) 이유수(李儒修)의 묘지명(墓地銘)을 撰하다. 승지(承旨) 신작(申綽)에게 주례육향(周禮六鄕)의 制를 서신으로 論하다. 김매순(金邁淳)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경서연구의 일단(一端)을 논평케 하다. 61세와 62세, 64세에는 시를 짓지 아니하다.
62세, 1823년(純祖 23, 癸未)
9월 23일 승지(承旨)로 전망(前望)되어 낙점(落點)되었으나 곧 환수(還收)되다.
63세, 1824년(純祖 24, 甲申)
시 소서팔사(消暑八事) 등 58편 62수를 짓다.
64세, 1825년(純祖 25, 乙酉)
65세, 1825년(純祖 26, 丙戌)
시 송옹지(淞翁至) 등 23편 62수를 짓다.
66세, 1827년(純祖 27, 丁亥)
10월 윤극배(尹克培)는 겨울 우뢰로 인한 구언상소(求言上疏)에서 참혹하게 다산을 무고(誣告)함에 못하는 말이 없었다. 때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대리(代理)하던 초년이었다.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인재(人才)를 구함에 다산을 서용(敍用)하려 하니 반대파들이 그 실상을 알고 윤극배(尹克培)를 사주하여 소장을 올리었다. 소가 들어가자 정원(政院)에서 받지 않으므로 정원(政院)에 가서 바치었다. 윤극배(尹克培)를 엄하게 추문하여 무고함이 밝혀지다. 시 천진소요집(天眞消遙集) 등 29편 41수를 짓다.
67세, 1828년(純祖 28, 戊子)
시 송파수작(松坡酬酌)의 우차육방옹농가하사육수(又次陸放翁農歌夏詞六首) 등 24편 93수를 짓다.
68세, 1829년(純祖 29, 乙丑)
시 희시박경유형제걸서목간례(戱示朴景儒兄弟乞暑目簡禮), 설의(雪意) 등 16편 77수를 짓다.
69세, 1830년(純祖 30, 庚寅)
5월 5일에 약원(藥院)에서 藥을 의논하여 올리자는 상소로 인하여 부호군(副護軍) 임명에 단부(單付)되다. 6일 새벽에 대궐에 들어가 진료하다. 이해에 윤극배(尹克培)가 또 다산을 모함하는 사서(邪書)를 소매에 넣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에게 보냈으나 김조순(金祖淳)은 이를 <호화지사(好禍之事)>라 하고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하여 윤극배(尹克培)의 계책이 무산되다. 12월에 제자(弟子) 초의선사(草衣禪師)가 다산(茶山)을 찾아와 뵈다. 시 경인제석동제우분음(庚寅除夕同諸友分韻) 등 43편 98수를 짓다.
70세, 1831년(純祖 31, 辛卯)
시 하일전원잡흥효범양이가체이십사수(夏日田園雜興效范楊二家體二十四首) 등 31편 70수를 짓다.
71세, 1832년(純祖 32, 壬辰)
시 <나는 조선사람이기에 / 즐거이 조선시를 쓴다>고 조선시선언(朝鮮詩宣言)을 한 노인일쾌사육수효향산체(老人一快事六首效香山體), 견여탄(肩輿嘆) 등 26편 51수를 짓다.
72세, 1833년(純祖 33, 癸巳)
시 황년수촌춘사십수(荒年水村春詞十首) 등 4편 31수를 짓다.
73세, 1834년(純祖 34, 甲午)
봄에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개수 합편(合編)(21권)하다. 가을에 매씨서평(梅氏書平)을 개정하고 1권을 보태니 10권이 되다. 11월에 순조(純祖)의 병환으로 소명(召命)을 받고 12일 떠나 다음날 새벽에 동점문(東漸門)에 이르니 이미 승하, 그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오다.
74세, 1835년(憲宗 1년, 乙未)
73세와 74세에는 시를 짓지 아니함.
75세, 1836년(憲宗 2, 丙申)
2월 22일 진시초(辰時初)에 향리에서 서거(逝去)하다. 이날은 다산(茶山)과 홍씨부인(洪氏夫人)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이다. 나흘 전에 환후가 있었는데 21에 회복의 가망이 없었다. 운명하던 날 진시(辰時)에 큰 바람이 땅을 쓸고 햇빛이 컴컴하여지고 안개가 자욱히 끼었다. 문인(門人) 이강회(李綱會)가 서울에 있었는데 큰 집에 폭삭 무너지는 꿈을 꾸다. 4월 1일 유명(遺命)에 따라 장사하다. 곧 여유당(與猶堂) 뒤 광주(廣州) 초부방(草阜坊) 마현(馬峴) (現 양주군 瓦阜面 陵內里) 자좌원(子坐原)이다. 운명하기 3일전에 쓴 회근시(回詩) 1편 1수를 쓰다.
Ⅸ. 다산 정약용의 현대적 의의
다산은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그의 독자적인 교육사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육관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재고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학문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를 개편하려고 했다. 다시말해서 실용성에 입각해서 직업의식을 개조하려고 했으며,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둘째, 이러한 경향에 부합되는 교육제도를 확립함과 동시에 사회윤리를 쇄신하려고 했다. 또한 과거제도의 모순점을 개선하고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교육과 학문과의 관련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세째, 새로운 인간관, 즉 평등사상에 기초한 근대적인 민권의식을 토대로 교육의 효과를 높이려고 했다.
네째, 합리적인 사고의 틀 위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자아의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이상과 같은 다산의 교육사상은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학문연구의 방향을 시사하는 것이었으며, 민족주체사상, 평등사상, 민권의식, 진취성, 개방성, 과학기술의 정신강조, 사회윤리관 등은 현대교육에까지 그 정신이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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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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