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영유권문제][독도]한국과 일본의 독도영유권문제와 독도의 중요성(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의 중요성, 독도에 관한 일본의 주장, 한국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사, 독도가 우리땅인 역사적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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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도영유권문제][독도]한국과 일본의 독도영유권문제와 독도의 중요성(독도 영유권 문제, 독도의 중요성, 독도에 관한 일본의 주장, 한국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사, 독도가 우리땅인 역사적 증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독도개관

Ⅲ. 역사속에서의 독도

Ⅳ. 독도와 대동여지도

Ⅴ. 독도 영유권 문제

Ⅵ. 독도의 중요성
1. 경제적 중요성
1) 해양 자원
2) 천연가스, 하이드레이트
2. 지질학적 중요성

Ⅶ. 독도에 관한 일본의 주장
1. 일본의 주장
1) 한국의 공도정책은 영유권 방기
2) 시네마현 고시로서 일본영토로 정식편입주장
3) 일본은 독도영토편입은 1905년에 완성된 것
4) 미일간의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제2조 독도미명기주장
5) 일본, 독도를 1600년경부터 이용
2. 일본 독도영유권 주장전략
1) 무주지 선점론
2) 고유영토론
3) 독도분쟁지역화

Ⅷ. 일본에서 부르는 독도의 이름
1. 송도(松島: 마쯔시마)
2. 죽도(竹島: 다케시마)
3. 우산도(于山島)
4. 리양꼬도

Ⅸ. 독도 영유권 주장과 관련된 일본측 동향

Ⅹ. 한국과 일본의 독도 영유권 분쟁사

Ⅺ. 독도가 우리땅인 역사적 증거
1. 역사적 증거Ⅰ
1) 삼국사기
2) 세종실록 지리지
3) 숙종실록
2. 역사적 증거 Ⅱ

Ⅻ. 결론

본문내용

이 오류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Cortende la coree 조선전도- 연도: 1846년/ 편찬자: 김대건/ 규격: 59X100 ㎝
근대적 작도법에 의해 작성된 지도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보다 15년이나 앞선 지도이다. 이 지도는 김대건이 우리지명을 프랑스 발음으로 표기하였으며 울릉도와 우산국(독도)를 정확히 우리 영토로 표시하고 있다.
1849년 리용 <지리학회보>에 축소 수록 되었고 원본은 프랑스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클라프로트(J. Klaproth)의 삼국 총도- 제작연도:1832년
클라프로트(1783-1835)는 베를린 태생의 역사학자 및 언어학자로 대부분의 서구 언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와 일본어까지 능통한 당대 제일의 동양학 관계 학자 였다.
그는 베를린, 페테스부르크(현재 레닌그란드), 모스크바 등의 도서관에 소장된 동양학 관계자료의 정리를 책임맡을 만큼 권위있는 학자로 한국어의 기초도 익힌 적이 있다. 파리의 국립 동양어 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있으면서 [아시아 역사지도첩](1826년)과 [아시아의 제언어](1823년)등을 저술하였고. 1832년에는 영국왕실의 동양학 서적 번역기금을 얻어 일본에 살던 중국계 학자 임지평의[삼국통람도설]을 번역하였고 거기에 삼국총도 및 조선팔도 지도를 별도로 첨가하였다.
이지도가 본래 1785년도에 중국과 일본의 자료를 중심으로 작성되었다는 점과 1832년에는 당대 동양햐의 권위자 클라프로트가 주석을 첨가하여 동양 3국에 관한 저서에 첨부되었다는 사실은 이 지도의 중요성을 입증시켜 준다. 임자평의 [삼국통람도설]을 번역한 클라프로트는 그 책 안에 부록 지도첩으로 삼국총도 및 조선팔도지도를 첨가했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문자로 명기하고 있으므로 독도문제에서 상당히 중요한 자료이다.
. 결론
독도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첫째 신라 지증왕 13년(512),「울릉도와 독도를 우산국(于山國)」이라 하면서 이 섬은 우리 영토에 처음으로 귀속된다. 둘째 「고려사」지리지에서 우산과 무릉(武陵)이 본시 두 섬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우산은 지금의 독도이고, 무릉은 울릉을 말하는 것이다. 셋째 조선 성종 연간에는「독도의 봉우리가 셋이 있다」해서 삼봉도(三峰島)라 불렸고, 넷째 정조 18년에는 「물개(可支)가 서식한다」하여 물개섬(可支島)이라 하였다. 다섯째 고종 경자년(1900) 칙령(勅令)제41호에 「울릉도가 죽도(竹島)와 석도(石島)를 관할한다」하여 독도를 돌 섬이라 하고 울릉도 소관임을 분명히 했다. 여섯째 광무 10년(1906), 일본인들이 그들의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알리자 울릉도 군수 심흥택(沈興澤)이 「본관 소속 독도(本郡所屬獨島)」라 하여 상부에 그 부당성을 보고함으로써 「독도」라는 명칭은 처음 등장한다.
이처럼 독도는 신라 지증왕이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우산국(于山國), 우산도(于山島), 삼봉도(三峰島), 가지도(可支島), 석도(石島), 독도(獨島)란 이름이므로 우리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 내려왔다.
그렇다면 일본의 독도에 대한 명칭은 어떠한가
일본은 소위 1905년 시마네겐고시(島根縣 告示)제40호에 의해「자금(自今)이후 다케시마(竹島)라고 호칭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이전 일본이 다케시마(竹島)라고 부른 것은 울릉도였다. 숙종 실록 20년 8월 조에는「본시울릉도이이기산죽혹칭죽도차내일도이이명야(本是鬱陵島而以其産竹或稱竹島此乃一島而二名也)라 하였다. 즉 죽도(竹島)란 「대가 난다」하여 대섬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울릉도의 다른 명칭이지 결코 일본의 이름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마저도 죽도(竹島)가 일본 이름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실정이다.
또 일본이 1905년 이전 부르던 독도의 이름은 마츠시마(松島)였다. 그런데 소위 시마네겐고시를 하면서 다케시마(竹島)라 부르던 울릉도의 이름을 독도의 명칭으로, 독도의 이름이던 마츠시마(松島)를 울릉도로 뒤바꾼 것이다. 그러나 1883년 일본 내무경(內務卿)이 각 부현(府縣)장관 앞으로 발송한 공식 문서에 보면 「일본칭 송도 일명 죽도 조선칭 울릉도(日本稱 松島 一名 竹島朝鮮稱鬱陵島)」하였다. 즉, 「죽도(竹島)」「송도(松島)」는 모두 조선의 울릉도를 부르던 이름이라 하여 독도에는 진작부터 그들의 명칭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의 해군성 수로부가 펴낸「조선수로지」나 지도에는 한결 같이 「리앙꼬르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리앙꼬르암」이란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이 조선해를 지나다가 독도를 발견하고 선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처럼 그들이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마츠시마(松島)」또는 제3국 명칭인「리앙꼬르암」등으로 명칭하면서 숱한 혼란을 일으켰던 것은 한마디로 독도가 그들의 영토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가 아닌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첫째 「다케시마(竹島)가 자기나라의 고유영토」라는 것이다. 둘째 1905년 1월 28일 일본 각의 결정에는 「… 무인도는 타국이 점령하였다고 인정할만한 형적이 없어…본방 소속으로 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의 주장처럼 본시 그들의 고유 영토였다면 1905년 각의 결정에 「타국이 점령했다고 인정할 만한 형적이 없어」란 무슨 말인가. 셋째 도근현지(島根縣誌)와 은기도지(隱岐島誌)에 의하면 해군 수로부가 리앙꼬르암의 소속을 정하고자 거리를 측정컨대 일본 본토로부터 10리(里)(은기도지는 10리(浬))가 가까워서 자기들의 영토로 정하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명칭이나 영유권 주장은 우리의 반론이 필요 없을 만큼 이랬다 저랬다 하여, 그들의 영유권 주장이 얼마나 생트집과 억지로 가득 차 있는지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때 구국의 명장 이순신 장군은 일찌기 섬사람의 근성(=島根縣 告示),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이렇게 말씀하였다.
「트집을 일으키는 자는 우리가 아니고 왜인이다. 일본사람은 이랬다 저랬다 간사하기 짝이 없고 옛 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4백년 전에 이순신 장군이 우리 국민에게 오늘을 위하여 남기신 국토 수호의 좋은 교훈이다. 모든 국민이 심기일전하여 이 구절을 마음속 깊이 되새겨 우리의 독도를 지킬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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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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