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부산지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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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부산지역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부산 지역의 박물관들
3. 가야 문화 개관
4. 전기 가야 문화
5. 후기 가야 문화
6. 가야의 주요 유적․유물
7. 나오는 말

본문내용

경까지 다수의 돌덧널이 노출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경작지로 변해 있다.
고분군은 서북의 까치산과 동쪽의 마산이 길게 연결된 아 주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립박물관과 부산대 박물관이 모두 5 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다.
조사된 유구는 덧널무덤 59 기, 돌덧널무덤 93 기, 독무덤 17 기, 돌방무덤 12 등 총 181 기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1100 여점, 철기류 660 여점, 구슬류 180 여점, 귀걸이 41 쌍, 골촉 60 여점 등 총 2000 여점에 달하고 있다. 고분군은 4 세기에서 6 세기에 걸쳐 단절없이 조영되었으며,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모든 묘제가 중복되어 있어, 가야의 묘제가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해 갔던 과정이 확인되었다.
『삼국지』위서 변진전은 3 세기 경의 변한사회에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편두(偏頭)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예안리고분군에서는 무려 190 여구의 인골이 검출되어 고대한국인 내지는 가야인에 관한 풍부한 형질인류학적 자료를 얻게 되었는데, 이 중에서 앞이마가 심하게 후퇴하여 두개골 성형이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 10 구의 편두는 실제로 가락국에 이러한 풍습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들 편두는 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부산대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데, 1학년때 선배들과 함께 박물관에 갔다, 이 편두를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4) 동래복천동고분
복천동 유적은 당시 이 지역의 수장(首長)급 들의 묘로 일직선상(일자형)의 매장곽(부장품 을 넣기 위해서 따로 준비한 공간)을 갖춘 대 형목곽묘(덧널무덤)가 주류이다. 무덤 내에서 는 철정(덩이쇠) 등 풍부한 철기류와 토기 등 이 순장된 인골과 같이 출토되어 당시 그들의 경제적 부의 축적 뿐 아니라 정치적 권력집 중도 잘 보여준다. 철 생산과 철기류의 사용 은 복천동 유적을 조영한 세력의 성장기반이었다. 수혈식 석곽묘인 22호는 4세기 후엽에 발생한 것으로 지배층의 묘역에서 처음으로 채용되어 6세기까지의 가야의 옛터에 고총고분이 출현하는 양상과 시기가 같아서 그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복천동은 21·22호분(4세기 후엽에서 5세기 초) 단계부터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어 신라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21·22호분 이후 5세기 말까지 묘제의 변화는 3단계로 나누어지는데, 부곽이 점차 없어지고 주곽(시체를 안치하기 위해서 마련한 공간)에 흡수되며 그로 인해 평면형태가 장방형에서 세장형(폭이 좁고 길이가 긴 무덤)으로 바뀌어진다. 또한 신라문화의 확산으로 볼 수 있는 경주 황남동 109호분의 3·4곽에서 출토된 유개식고배(뚜껑이 있는 고배)와 같은 형태가 복천동 21·22호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신라계토기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총고분이 출현하는 시점에 어떠한 계기 또는 그 영향에 의해 낙동강 동안지역에 동시에 여러곳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10호분에서 마주가, 주곽인 11호분에서는 금동관·철제갑옷·환두대도 등이 출토되었으며, 22호분에서는 금동관, 샤머니즘적인 주술의 의미가 있는 청동제 7두령(방울이 7개가 달린 유물-제사에 쓰였다고 추정됨) 등이 출토되었다.
복천동 고분군의 발굴에 있어서 최대의 성과중 하나가 당시의 군사조직 및 정치사회 구조 등을 규명할 수 있는 철제갑옷의 다량 출토이다. 갑옷의 일정한 형식화는 4세기대 영남지방에서 이미 갑옷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일반화되어 있었으며 이미 완비된 군사체제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또한 이 4세기때 갑옷은 보병용으로 당시 전술이 보병전임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벽화에 묘사된 투구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영남지방의 4세기대 갑옷의 원류가 고구려의 갑옷문화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자이기는 형태에 따라 3개 지역군으로 나누어지는데 유자이기는 다분히 수장층 또는 지배층을 상징하므로 각 지방에 있어서 독립적인 수장권력을 의미하며, 특히 철정(덩이쇠)은 고대에 있어서는 강력한 통치의 수단이 되는데 규격이 경주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철정(덩이쇠)의 제작은 금관가야에서 강력한 수장의 통치하에서 획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보아 제작뿐만 아니라 철 생산과 철기의 제작까지도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7. 나오는 말
이상으로 가야 문화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후기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하는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다. 가야는 친백제노선과 친신라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한다.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이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이다.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 에 대한 외교활동을 벌였던 것이였다.
가야의 왕들은 이들을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안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 앞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다.
최근 발해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 되면서 7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초반까지를 통일신라시대가 아닌 남북국시대로 부르자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가야에 대한 연구가 많이 부족하지만, 가야에 대하여 좀 더 연구하고 그 결과가 나옴에 따라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라 불릴 날을 기대 해 보면서 이번 과제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가야사정책연구위원회, 《가야, 잊혀진 이름 빛나는 유산》, 혜안, 2004.
송종성, 《가야, 백제 그리고 일본》, 서림재, 2005.
이성주, 《신라 가야사회의 기원과 성장》, 학연문화사, 1999.
부산경남역사연구소, 《시민을 위한 가야사》, 집문당, 1996.
http://todori.inje.ac.kr/~kaya/ 가야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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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25
  • 저작시기2007.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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