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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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럽의 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성의 역사

시대별로 본 유럽의 성

한번 가볼만한 유럽의 성

아시아의 성

유럽과 아시아의 성 비교

본문내용

숭례문 북쪽 숙청문이고, 4소문은 동북쪽 홍화문 동남쪽 광희문 서북쪽 창의문 서남쪽 소덕문을 말한다. 흥인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쳐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부셔 길을 내기도 하였고, 한국전쟁에서도 많이 파괴되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있으며 현재 삼청동과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화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건축 양식의 경우 우리나라의 읍성은 중국의 평지성처럼 완전한 평지에 성은 지은 것이 아니라 산성의 구조를 야트막한 야산이나 구릉에 옮겨놓은 듯한 모습을 보이며 중국이나 일본처럼 방형의 성이 아니라 야산이나 구릉을 따라 짓기 때문에 포곡형의 보습을 띄며 인공 해자를 파지 않고서도 충분한 성벽높이를 확보 할 수 있다. 방어와 거주의 기능을 통합한 읍성은 지방행정 및 군사의 중심지 기능을 수행하였으며 읍성을 중심으로 지방 도로망 물자유통의 중추적인 기능을 수행하여 지방도시의 성장을 촉진 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성은 주민수용을 통한 총력전 양상을 띠어왔으며 적절한 주민수용공간이 필요 하였고 따라서 산성은 넓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포곡형의 산성이 많다. 또한 산의 절벽이나 높은 사면을 이용하면 해자 등의 인공 구조물을 파지 않고 성벽을 적절히 높일수 있었으며 석재가 조달이 용이하며 평지성에 비해 방어력과 규모를 크게 할수 있는 장점이 있어 산성은 한국 성곽을 특징짓는 것이다.
3. 일본
일본은 중국과 한국과 교류가 활발하였던 고대에 걸쳐 중국과 한국성곽의 영향을 받았으며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일본은 전국시대 천황은 존재하지만 막부를 중심으로 한 봉건제도 하에 있는데 이러한 정치적 특색으로 인해 중앙집권국가인 중국과 한국에 비해 다른 성곽양식을 나타나게 하는데 오히려 이러한 모습은 중세 유럽과 흡사 하며 이러한 봉건 막부 체제가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진다.
전국시대 일본의 성곽은 성이라기보다는 영주들의 거주지인 관이었다. 어느 정도의 방어 기능을 수행하긴 하였지만 군사적인 방어 기능은 불충분하여 방어기능을 중시한 산성을 건설하였는데 영주가 산성에서 거주 하는 일은 없었다. 전국시대가 도래하자 산성은 상시 시설로 발전하고 그 입지가 점점 산 아래로 내려와 영주들의 거주지인 관과 통합되며 성곽을 통해 권력을 과시하는 관으로서의 기능과 군사적인 방어목적이 합쳐지게 된다. 중국의 평지성과 한국의 읍성은 왕의 대리자로서의 권위를 가지므로 성곽은 방어기능에 충실하고 단순하게 축성되지만 일본의 성곽은 그 성곽주인인 영주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나타내므로 상당히 화려하게 지으며 그 예를 천수각 등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일본 성곽은 무사와 전사들의 생활공간과 주민들의 생활공간은 엄격히 분리되어 있으며 주민을 성안에 수용하고 주민들이 전쟁에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으며 전쟁은 어디까지나 무사들의 싸움이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주민수용과 동원을 통한 총력전 형태의 전쟁을 하였다.
유럽과 아시아의 성 비교
1. 외형
유럽의 성과 아시아의 성은 모습부터가 사뭇 다른데 대부분의 유럽 성의 모습은 높게 솟아 있으며 첩탑 등 기독교를 상징하는 요소가 많이 포함 되어 있으며 외형을 중시하여 성곽에 권위를 담으려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일본의 성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중국과 한국의 성곽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2. 기능
유럽의 성은 기본적으로 영주의 거주 공간으로 시작하였기 때문에 규모가 크지 않으며 주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공간이기 보다는 바이킹과 같은 외적들로부터 영주 자가 자신과 자신의 재산을 지키려고 만들었으며 바이킹 들이 노르만 공국을 세우고 개종하여 노략질을 멈춤으로 인해 각 영주들의 싸움에서 자기의 군대를 수용하고 방어 할 수 있게끔 변하였다.
중세시대 전쟁은 아시아의 전쟁과 사뭇 다른데 한국과 중국이 병농 일치의 총력전 적인 전쟁 양상을 띠었는데 비하여 유럽은 병사와 농민은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으며 농민 전쟁에 참여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쟁은 기사들의 몫이었고 직업 군인과 용병들의 몫이었다.
중세 서양의 성곽의 경우 높은 성벽과 해자 여러 가지 방어 시설로 함락이 쉽지 않았으며 공격하여 함락시키기 보다는 포위하고 협상을 하는 경우가 빈번 하였다.
이러한 방어 기능을 중시한 성곽들은 화포의 발달과 중세 봉건제도의 몰락으로 점점 쇠퇴하는데 특히 오스만투르크 군에 의한 로도스 섬의 함락과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군의 화포에 의해 함락되면서 유럽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유럽의 각국은 앞을 다투어 화포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러한 화포에 취약한 수직 구조에 석재로 만들어진 성은 방어적인 기능을 점점 상실하고 영주나 귀족의 저택으로 쓰이며 방어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요새로 나우어 지게 되었다.
3. 결론
유럽과 아시아의 성은 기본적으로 거주의 주체가 달랐으며 방호 하고자 하는 대상이 달랐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주체가 달랐으며 성곽의 건축양식이 큰 차이가 있었으며 건축 재료 또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유럽에서는 주로 석재와 벽돌을 많이 쓰는 반면 아시아에서는 흙과 석재를 많이 사용하며 유럽의 성은 대부분 비슷비슷한 양식을 띠며 종교적인 색체를 많이 띠는 반면 아시아의 성은 각국별로 다른 건축양식을 보이지만 그 속에 유고적인 색체가 녹아들어 있다. 유업 중세성의 경우 주로 군사적인 요충지 보다는 영주의 관이나 봉토의 관리가 용이한 곳에 주로 위치하였고 아시아의 성은 주로 군사적인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거나 군사 행정의 중심지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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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4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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