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사태에 관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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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미국의 지역통합전략과 한일회담의 전개과정
- 미국의 지역통합전략
- 한일회담의 전개과정

Ⅱ. 한일협정의 내용
- 기본관계
- 청구권 문제
- 재일교포의 법적지위협정

Ⅲ.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전개과정
- 정부의 한일회담 강행과 3.24 데모
- 4월 학생시위의 재개의 정부의 강경대응
-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5.25 난국타개학생총궐기 대회
- 6.3 데모와 계엄령 선포
- 6.3데모 이후의 사태 전개
- 6.3 항쟁의 주체세력과 그 결과

Ⅳ.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성격과 의의
- 한일조약 반대운동의 논리
- 성격과 의의
- 평가
- 잊혀진 이야기들

본문내용

정권 타도를 외치는 학생·시민의 대규모적 궐기에 대한 자기방위였다면, 65년의 위수령은 자기방위보다는 정권 반대세력에 대한 공격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의미는 권력투쟁과정에서 초점이 되었던 김종필의 움직임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64년 6·3사태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65년 위수령 이후 다시 롤 백하게 된다.
1년을 전후하여 이렇듯 박정권과 박정권 반대세력과의 공방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박정권이 64년을 겪은 후 노골적으로 독재의 길을 걸으며 폭압적 양상을 띠었다는 내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조속한 회담타결 요구와, 그로 인한 정권에 대한 지지가 외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직접 개입함에 따라 동북아시아 지역체제에 대한 결속 요구 및 한국군의 월남전에의 직접 개입 희망과 실천이, 박정권의 정권유지 욕망 및 이해와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구체적인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징이 보인다.
첫째는 학생운동이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64년 3·24에서 5·20이라는 2개월여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즉 분위기의 고양, 박정권의 허약성이 노출되는 4월 혁명을 전후한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박정권이 정일권내각의 형태로 일단 재정비된 후에야 조직적인 투쟁을 재개하였다.
둘째는 64년 5·20 이후 5월 말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을 이끌어갈 가장 최소한의 조직마저 부재했다는 점이다. 5·20 장례식 시위는 적은 참가 인원 수, 시위 양태에서의 소수의 극도 과격한 모습 등 비판의 여지가 상당히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의 무장공수대 법원난입사건은 전날 학생들이 보여 준 부정적인 면을 모두 상쇄하고 전 사회적으로 박정권 규탄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사회적으로 학생들의 조직적 힘이 표출되는 것이 요구되어졌다. 그러나 한계점 투성이의 학생회장단이 시위를 주도하게 되면서, 그 결과도 궐기대회라는 극히 소극적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던 것이다.
셋째, 65년의 경우 운동의 흐름에서 본질에서 일탈되는 사례가 빈번히 나타난다는 점이다. 서울 법대의 잦은 맹휴, 일본상품 불매운동, 학원 자유수호 투쟁 등의 예가 그것이다. 이것은 65년이라는, 64년보다 질적으로 변화된 상황에서 자기 체계를 갖지 못하고 상황에 이끌려간 당시 학생운동이 드러낸 자기한계이며, 이것은 곧 역사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반외세적 성향을 나타내며, 주로 반독재 투쟁적 성격을 띤다. 1960년대 이후의 한국사를 질곡하는 한·일관계의 구체적 출발은, 미·일간의 역할대위(代位)로서 한국민에게 다가왔다. 학생·지식인·야당 등은 정권욕에만 급급하여 한일회담을 졸속 진행하는 박 정권에 대항하여 싸웠다. 즉 64·65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회담 반대 운동은 18년 장기집권에 대항하는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서도 성격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반대시위를 주도한 학생들도 불철저한 이념으로 상당수 이후 현실에서 여지없이 자기를 변신시켜갔다. 역사적 사건이 모두 그러했겠지만, 특히 6·3 사태라고 불리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상징적 사건은, 그 인물의 현재의 모습에서가 아니라 그 운동이 가졌던 운동 초기적 흐름의 한계 및 그것이 끼쳤던 영향, 교훈 등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4. 잊혀진 이야기들
한일회담에 대해서는 ① 청구권 문제, ② 반공체제 문제, ③ 평화선 문제, ④ 미국의 대한원조 문제, ⑤ 회담과정의 공개 문제, ⑥ 기본관계의 조문 문제를 두고 추진하는 정부 측과 이에 반대하는 투쟁위원회측이 대립했다. 찬반양론의 논제와 실제의 한일협정의제를 비교해보건대,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문제나 문화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1960년대 한국 내에는 재일동포의 생활상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적국으로 간주하다시피 하던 일본에 60만이라는 수의 동포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처우에 대한 협정에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일제 36년간의 착취에 치를 떨면서도 일제가 가져간 문화재를 돌려받는 일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문화재 반환은 형식적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
한일회담은 무려 14년간 진행되었으나, 그 기간 동안 회담실무자들은 서울과 도쿄를 오가기만 반복했을 뿐, 누구도 꼼꼼하게 한일협정의 내용을 준비하지 않았다. 한일회담 반대가 거족적으로 일어났지만 대일 저자세 등 감정적 측면에 치우쳐 협정내용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박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반대운동은 야당과 학생에 의해 주도되어 주로 간략한 반대의견들이 개진되었을 뿐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구체적이고도 전문적인 반대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미국의 대동아시아 정책의 변화도 충분히 인식되지 못했다. 이는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그 수적 규모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1961년 1월 '한일회담대책연락회의'를 조직하고 안보(미일신안전보장조약)투쟁의 열기를 지속시켜 안보반대-한일협정-베트남침략을 연관시키는 총체적 투쟁을 전개했던 것과 매우 대조적인 양상이다. 홍인숙, 「한일회담 반대파동」『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2000, 역사비평사)
* 참고문헌
소정훈「미 세계전략의 변화와 한일협정」『해방 40년의 재인식』1, 돌베개, 1985
이종원 「한일회담의 국제정치적 배경」,민족문제연구소『한일 협정을 다시 본다』,아세아문화사, 1995
이원덕, 「한일협정의 결과」, 민족문제연구소『한일 협정을 다시 본다』,아세아문화사, 1995
민족문제연구소, 『한일협정을 다시 본다』, 아세아문화사, 1995
이원덕, 『한일 과거사 처리의 원점』, 서울대학교출판부, 1996
김영미·장원정, 「한일협정과 굴욕외교반대투쟁」, 「한국현대사」 3, 풀빛,1991
6.3 동지회, 『6.3학생운동사』(2001. 역사비평사)
오오타 오사무, 「한국에서의 한일조약 반대운동의 논리」『역사연구』2001.
홍인숙, 「한일회담 반대파동」『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2000, 역사비평사)
이재오, 『한일관계사의 인식』(1984, 학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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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9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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