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사상]실학의 등장배경 및 발달과 실학자의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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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작하며

2. 실학의 개념 및 발생
2.1. 실학사상의 발생요인
2.2. 실학자들의 관심분야

3. 실학의 등장배경
3.1.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 - 내재적 배경
3.1.1. 사회내부의 변화
3.1.2. 사상적 배경
3.2. 외부적인 요인
3.3. 실학의 성격에 대한 논의

4. 실학자의 역사관
4.1. 초기의 실학자
4.1.1. 유형원
4.1.2. 이익
4.2. 중기의 실학자
4.2.1. 홍대용
4.2.2. 박지원
4.2.3. 박제가
4.2.4. 정약용
4.3. 후기/말기의 실학자

5. 실학의 의의

6. 실학에 관한 나의견해

본문내용

태도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정체된 봉건사회를 극복하고 근대정신을 잉태하는 태반의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실학은 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전제로 한 조선 후기의 근대지향적 과도기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 개혁에 대한 탐구로써 경세치용의 학문, 농·공·상의 기술적 개혁으로서의 이용후생학, 실증적 정신의 학문연구 방법 등으로 나타난 것이다.
6. 실학에 관한 나의견해
여기서는 실학의 성격에 대한 본인의 입장을 지금까지의 실학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여 얻은 이해를 중심으로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다.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고 현실의 개혁과 안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학문적 기풍이었다. 기본적으로 유학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출발하였으나 당시 지배층이 고집하고 있던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 와 학문의 범위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여 실학사상 역시 복잡하고 다양하므로 한두 마디로 요약하기가 어렵다. 또한 여러 가지 제약과 한계성이 있어서 선명하게 성격을 규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한계성을 전제로 하고서 실학사상의 성격 을 규정하자면 대개 민족주의적 성격과 민본평등적 성격, 그리고 근대지향적 성격으로 요약할 수 있고 더 나아가면 국민국가의 형성을 전망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1) 민족적 성격 실학의 민족적 성격은 단적으로 華夷論 否定에서 나타났다. 이익은 각민족 각국가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 한국문화의 독립성을 강조하였고 다산은 다른 실학자보다 더 강력하게 華와 夷의 종족적 지역적 구별을 否定하여 우리 민족문화의 독립성 내지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에 한국사를 시험과목으로 부과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었다. 따라 서 집권층 사대부의 慕華思想과 尊周大義論에 심한 반발을 보였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각과 긍지를 분명히 하였다. 또 실학의 민족적 성격은 당시 서양문물과 과학지식에 자극되어 세계관 확대에 따른 자아의 각성으로 강화, 中國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란 주장을 통해 더욱 확신되었다. 가령 지구구체설이나 地動說로 볼 때 세계에서 고정된 '가운데 나라' 즉 '中國'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각개 민족문화의 동등성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한국문화의 독자성과 개성에 눈을 뜨게 하였고 이와 같은 민족적 성격은 韓末·日帝 때에 一群의 계몽적 사학자들에 의해 민족주의 사학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2) 민본·평등적 성격 실학은 또한 민본주의를 지향하면서 농민이나 상공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중농적 실학자들이 토지개혁론이나 토지분배론을 농민편에 서서 강력히 주장한 것이나 중상적 실학자들이 商工奬勵와 대외교역론까지 강력 히 제시한 것은 민중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신장시키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민'을 중시한 것이었다. 다산은 그의 湯論에서 통치권력의 발생은 民이 원천이라고 하여 정치는 아래로부터 위로(下而上) 실시되는 것이 순서이며 天子도 民이 추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은 民이 주체가 되어 정치권력을 행사해야 된다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일종 의 민주주의적 요소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특권과 신분계급제에 대한 회의를 갖고 나아가 이의 폐지를 지향함으로써 平等·均産의 사회를 염원하고 있었다는 종래의 학설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종래의 학설에는 유수원이나 박지원·박제가 등은 양반 의 비리와 游食을 통박하였으며 따라서 양반사회의 토대인 노비제도를 궁극적으로는 철폐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일시적으로 는 어렵기 때문에 노비세습제의 폐지, 奴婢選上入役의 폐지, 奴婢身貢의 감면 등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철폐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다산의 여전제 구상에 따르면 노비제도는 그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조선 전기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분제의 붕괴가 절정에 올랐다는 소위 조선 후기 신분제 붕괴론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18∼19세기인 조 선 후기에 있어서도 시대이념은 거의 유일한 儒敎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들 신분제 붕괴론자들은 근대적 성 격의 하나인 평등사상이 조선 후기에도 맹아적 발아가 있었다고 보고 그러한 근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조선의 신분제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공노비의 해방, 노비신공의 감면, 노비종모법의 시행 등으로 실학자의 개혁안이 부분적이 지만 채택되어 그 실시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신분제 붕괴 내지는 신분 해방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학의 이상 사회로의 구현인 민본정치로의 복귀 속에서의 민의 평등을 이야기한 것이지 , 다시 말해서 이른바 '君君臣臣父父子子'로 대표되는 유교이념의 실현을 염원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민의 대리자인 임금마저도 노비를 양반으로 올려준다든지 평민을 양반으로 올려준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는 절대로 할 수 없었음을 밝혀 둔다. (3) 근대지향적 성격 실학자들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민본적 이상사회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여러 가지 제도적 개혁론과 商工장려, 기술수용론 등은 결과적으로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경세치용학파의 토지제도 개혁론에서 근대적 성향이 표출되었고 이용후생학파의 상공업 및 화폐경제의 발달촉구라든가 경영의 합리화, 외국무역의 주장 등에서 근대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士農工商의 분업과 전문성, 賤業觀·末業觀을 부정하는 직업윤리관의 설정 등은 등질적 국민경제 의 성립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근대적인 요소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은 韓末 개화파 사상가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실학의 근대적 요소가 더욱 드러나 보이게 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김종문·장윤수,『한국 전통 철학 사상』,소강,1997
윤사순, 『신실학 사상론』,예문서원, 1996
김아리, 『실학 산책 상/하』,서해문집, 1994
정성철, 『실학파의 철학사상과 사회정치적 견해』,도서출판 한마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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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1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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