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문학의 정의와 개념과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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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1. 한문문학의 정의
2. 한문문학의 개념과 특성

Ⅱ. 본론
1. 상고(上古)시대 (삼국 시대에서 고려 전까지)
2)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한문문학의 특징
2. 고려시대
2) 고려시대의 한문문학의 특징
3. 조선시대 (조선전기, 조선후기)
2) 조선시대의 한문문학의 특징
3) 조선중기 이후의 한문학
② 조선 후기 한문학의 전개와 특징

Ⅲ. 결 론

본문내용

품들은 『해행총재 海行摠載』나 『연행록선집 燕行錄選集』 등에 수록되어 있다.
다음은 악부의 발달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악부가 크게 발달하지 못하다가 후기에 와서 얼마간의 성과를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이제현이 속가(俗歌)를 칠언으로 한역하여 소악부(小樂府)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해동악부(海東樂府)라는 명칭까지 출현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풍습을 담은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김종직의 「동도악부 東都樂府」,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 이익의 「성호악부 星湖樂府」, 정약용의 「탐진악부 耽津樂府」, 이학규(李學逵)의 「영남악부 嶺南樂府」, 그리고 김려(金錤)의 「사유악부 思蓬樂府」등이 있다. 이러한 악부들은 일반적인 한시가 개인의 서정세계를 추구하는 데 비해 우리 나라의 역사풍물 등 한국적 정서를 노래한 점에 가치가 있다.
3) 조선중기 이후의 한문학
② 조선 후기 한문학의 전개와 특징
조선 후기에는 실학파(實學派) 문학과 위항(委巷)문학이 대두하였다. 실학파 문학은 지식인으로서 선비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며 그 개혁의 방향을 모색한 일군의 학자들의 문학을 말한다. 그 유파로는 경세 치용학파(이익, 이용휴, 이가환), 이용후생학파(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그리고 실사구시파(김정희)가 있다.
한편 위항문학은 위항(委巷)인이라 하는, 양반 사대부 계층과 서민 사이의 중간 계층인 중인, 서리들의 문학을 말하며 송석원시사 (松石園詩社)와 같은 문학 그룹 형성. <소대풍요(昭代風謠)> 등의 중인 시선집도 발간하였다. 대표적인 위항시인으로 홍세태, 천수경, 조수삼 등이 있다.
조선 후기의 한문학자로서 천장(千丈)의 기염을 토한 이는 박지원(朴趾源, 1737~1805)과 신위(申緯, 1769~1847)였다. 박지원은 그 때까지의 고문파의 순정문학(醇正文學)에 대항하여 새로운 문체를 확립하고, 실학적 기풍을 담은 『熱河日記』의 웅편(雄篇)을 저술했다. 당시의 사대부들로부터는 위학(僞學)이라 하여 비방을 받았지만 그의 단편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겋과 같은 시류에 대한 반항이 그의 문장 속에 넘쳐 있었다. 그의 문장은 그 청신함으로 말미암아 환영받았다.
그의 제자인 이덕무(李德懋, 1739~1793)는 박람강기(博覽强記)로 청국에 여행하여 중국에서도 그 문명이 높았으나 서류이기 때문에 높이 기용되지 못했고, 능문(能文)의 정조(재위 1776~1800)가 규장각을 두면서 검서관이 되어 많은 편서에 관계했을 뿐이다. 그의 「靑莊館全書」는 우주만상을 포유하는 박학을 보여 주고 있다. 같은 박지원의 제자로 박제가(朴齊家, 1744~?)와 유득공(柳得恭, 1747~?)도 검서관으로 서리수(徐理修)와 함께 편서에 참획(參劃)하여 이들을 사검서라 일컬었다. 이서구(李書九, 1754~1824)는 같은 박지원의 제자로 명문의 후예인 데다가 문학도 정련되어,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과 함께 사가(四家)로 불리웠다.
이 사가의 뒤를 이어 등장한 시인이 신위(1769~1847)였다. 그는 시 서 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중국에 여행하여 「警修堂集」을 남기고 있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서류 시인 문학자가 나타나 예원을 빛나게 하였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조선 말기 서울 선비들의 놀이터였던 송석원에 모이던 시인들의 모임. 송석원은 현재 서울 종로구 옥인동 칠성대 부근이다-를 만들어 이들 서류(왜항) 시인들을 한데 모았던 천수경(千壽慶, ?~1818)과 그 밖에 장혼(張混), 조수삼(趙秀三, 1762~1849) 등 유위(有爲)의 문재를 가졌으면서도 서류이기 때문에 사대부가 될 수 없었던 그들은 그들끼리의 써클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 委巷人의 대두는 이 시기 한문학의 시대적 특색을 이루는 것이며 이들과 중인이 서울의 지식인으로서 다음의 개화문인의 중핵을 이룬다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Ⅲ. 결 론
한문학은, 최근 약 반세기 전에 이르러 한글이 본격적인 가치를 찾게 된 후, 비로소 한국 역대의 문학작품 중에서 한문자로 쓰인 것을 한문학이라 하여 정음문학(正音文學)과 구별이 지어졌다. 중국문학을 그 시대에 따라 개관한다면 대체로 시경(詩經)초사(楚辭)한부(漢賦)육조변려(六朝騈儷)당시(唐詩)송사(宋詞)원곡(元曲)명소설(明小說)청극(淸劇)으로 이어지면서 그 주조(主潮)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한국의 한문학에 직접간접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한문학이 무조건 중국문학을 추종한 것만은 아니었으니, 그것은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또는 민족성과 향토적 정서에서 많은 차이점 및 독창성이 개재되었기 때문이다. 중국문학의 작풍이 웅혼(雄渾)광막(廣漠)하다면 한국의 그것은 청아(淸雅)천면(眠)하였으며, 그 기력(氣力)은 비록 중국을 따르지 못한다 해도 그의 정치(情致)에는 부족함이 없었고, 양적으로는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질적으로는 거의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양적인 면에서 국문 문학과 비할 바가 못 되지만 한문학은 20세기라는 근현대 100년 동안 한국 문학의 의미 있는 한 가지 양식으로서 엄연히 존재하여 왔다. 한문학은 설화나 민요 같은 구비문학을 받아들여 작품화하고, 구비문학으로 표현되던 민족의 삶을 맡아 나섰다. 건국신화 이래의 설화를 기록하고, 민요를 한시로 옮기는 것이 바로 그런 작업이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한문학이 구비문학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민족의 문학, 민중의 문학으로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노력을 적극화했다. 민요를 따르는 악부시나 설화를 활용한 야담이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비문학과 한문학이 끼친 전통을 국문문학에서 받아들여 계승하는 생성의 작업을 충실하게 한다면 우리 국문학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 참고문헌 ♠
1.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1~4, 知識産業社, 1982~1986)
2. 韓國古典詩學史 金鎣大 外, 弘盛社, 1981)
3.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대출판부, 1974
4. 이가원 『연암단편소설』 을유문화사 1988
5. 구자균 『조선평민문학사』 고려출판사, 1948
6.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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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16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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