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정치][정부형태][미의 기준][철학][과학]그리스의 정치, 정부형태, 미의 기준, 철학, 과학 심층 분석(그리스, 정치, 정부, 철학, 그리스의 정치와 정부형태, 그리스의 미,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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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그리스][정치][정부형태][미의 기준][철학][과학]그리스의 정치, 정부형태, 미의 기준, 철학, 과학 심층 분석(그리스, 정치, 정부, 철학, 그리스의 정치와 정부형태, 그리스의 미,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그리스의 정치와 정부형태
1. 헌법
2. 대통령
3. 행정부
4. 의회
5. 사법부
6. 정당
1) 신민당(New Democracy Party : ND)
2) 사회당(Pan- Hellenic Socialist Movement : PASOK)
3) 공산당(Greek Communist Party : KKE)
7. 지방행정

Ⅲ. 그리스의 미

Ⅳ.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본문내용

리적 일관성과 그 전제가 갖는 진리성은 흔히 철학을 불가지론과 회의주의에로 강요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철학이 사회에 위험하다고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록 많은 그리스인들이 이런 새로운 발전을 놀랍게 여겼을 지라도, 그들이 이런 새로운 발전들에 강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관용에 대한 신뢰 덕분이다. 실로, 자연 과학의 비종교적인 것에 연루되어 있음에 대한 공격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자기 확신의 토대를 허물어가고 미신을 새롭게 추겨 세우게 될 때까지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런 공격 배후에 정치적 동기들이 없지 않았나 추측된다. 페리클레스의 적들이 그를 공격하려할 때, 그들이 한 운동 중의 하나는 아낙사고라스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아낙사고라스는 달이 흙으로 되어있고, 태양은 페로폰네소스 반도보다도 더 큰 찬란히 빛나는 바위덩어리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식과 월식의 진정한 원인을 발견하였다. 신성한 것들을 믿지 않고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한 이론들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해 고발하는 법률적 권한을 부여받은 디오페이데스가 그를 의심쩍은 선각자로 불렀다. 아낙사고라스는 기소되어 유죄로 판결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람프사코스로 도피하여, 거기서 평화롭고 추앙받으면서 살았다. 이 아낙사고라스의 경우가 박해의 유일한 경우는 아니다. 디아고라스, 프로타고라스, 그리고 아마 유리피데스 까지도 유사한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렇지만 가장 유명한 재판은 전쟁후 기원전 399년에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기소 및 사형집행이었다. 기소장은 교묘하게 짜졌으며,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 국가에서 공인한 신들을 믿지 않고 새로운 신들을 소개한다’ 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재판 배후에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그 이유로는,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후인 기원전 404년에 아테네를 무자비한 잔학성으로 지배했던 30인 통치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제 고소장은 ‘하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연구하고 있고 대지 아래의 모든 것을 탐구해온 현인인 어떤 소크라테스가 있다.’라는 일반 편견에 호소력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점에 사실인 요소가 있었거나 있어 왔었다.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 자연현상에 관심이 있었다. 기원전 423년의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에서 소크라테스의 관한 것들이 다음과 같이 웃음거리로 되어졌다. 제우스는 있지도 않으며 그리고 제우스의 지배가 디노스, 혹은 소용돌이 에게 넘겨졌으며, 더구나 비, 천둥과 번개는 하늘의 신에 의해 보내진 것이 아니라 구름들 속의 볼품없는 혼란에서 온다라고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 배웠다라고 쓰고 있다. 소크라테스를 고발하는 내용의 전반부는 확실히 소크라테스 견해들을 쉽게 우스꽝스럽게 하였기에 지지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후반부도 적지 않게 중요한데, ‘ 신의 손짓’에 대한 언급이었다. 이 신의 계시를 소크라테스는 자기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어떤 특별한 신에 결부되지 않았다. 결코 절대적으로 사실 무근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 두 죄목의 교묘한 결합은, 그 시대의 성난 분위기 아래에서는, 소크라테스를 사형 언도하기에는 충분하였다. 확실히 그는 자신이 진지하게 받아드릴 수 없었던 고발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굽혀 선처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진지했던 그가 중요시하는 것을 중단했던 과학을 위해 순교해야만 했다는 사실은 기이한 아이로니이다.
결코 심각성이 덜하지 않는 과학과 철학사이의 또 다른 갈등이 이러한 과학과 종교 사이의 갈등에 필적하게되었다. 과학과 철학모두 에 있어 과거에 그처럼 많았던 옛 결합은 자연과 인식가능성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에서 깨지게되었다. 과학이 그 체계의 토대를 감각에 두고 감각이 주는 것에 만족하는 반면에, 감각은 결코 신뢰될 수 없고따라서 지식의 확실한 기초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철학은 여겼다. 다른 한편으로 의학저술가는 추상적 논변의 타당성을 부정한다:
‘단순히 말뿐인 결론들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실증적인 사실에 기반을 둔 것들만이 결실을 맺는다. 왜냐하면, 확언과 말은 잘 속이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누가 의료기술이라 우리가 부르는 그처럼 쓸모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습관을 획득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그 결론에서도 사실을 굳게 잡아야하고 끈질기게 사실에 마음을 써야 한다. ’
다른 한편으로 철학은 사고의 대상인 실재는 정신에 의해서만 발견되어질 수 있다고 언제나 주장하여 왔다. 수많은 견해들이 이러한 정신적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 개진되어 왔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러한 실재의 가능성이 부정된다면, 철학은 거의 존속할 수 없다. 그리고 감각이 주는 것들, 혹은 ‘사실들’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고르기아스( 기원전 약 483-376년)가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가 논하기를, 감각의 대상들과 지식의 대상들 똑같이 비실재적이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존재와 마찬가지로 비존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 사이를 구분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다. 즉, 비록 어떤 것이 존재한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더구나 우리가 그것을 안다해도, 우리는 그것을 다른이들에게 전할 수 없다. 이말 속에 어떤 역설이 있다. 그리고 비존재의 개념이 명백한 반대에 열려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답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만약에 철학의 방법들이 그들의 한계로까지 내몰리게된다면, 그 방법들은 철학그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프로타고라스는 그 해결책을 제시하려하였다. 그 해결책으로 ‘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더구나 사물들은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있다고 그는 가르쳤다. 논리적으로 그러한 이론은 유아론으로 만 나아가게 하여 무한히 이어지는 고립되고 사적인 우주에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한 사적인 우주속에 갇혀있는 자는 서로서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어 서로 단절되어 있다.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철학과 과학사이의 행복한 관계들이 위기에 봉착하였고 그래서 그런 관계들이 결코 부흥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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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2
  • 저작시기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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