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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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전쟁의 발발 배경
1. 청일 전쟁의 총제적 배경
2. 정치적 요인
3. 군사적 요인
4. 경제적 요인

Ⅲ. 전쟁의 경과
1. 개전 직전의 상황
2. 한반도에서의 전투
3. 중국 본토에서의 전투

Ⅳ. 전쟁의 결과
1. 시모노 세키 조약
2. 삼국 간섭

Ⅵ. 전후의 일본
1. 일본 자본주의 체제의 발달
2. 이 시기의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
3. 정당의 동향

Ⅶ. 청일전쟁의 영향과 의의

Ⅷ. 결론

본문내용

다. 야마가타와 이토는 정계의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천황을 보좌하는 원로로서 내각의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Ⅵ. 청일 전쟁의 영향과 의의
청일 개전 당시 일본은 큰 승리를 예상하지 못했다. 단순히 내정문제의 돌파구를 찾는것과 '독립'조선에 대한 지배권 확립 그리고 약간의 배상금 정도였다. 그러나 잇단 승전과 반청(反淸) 열기로 영토점령으로 까지 팽창된 무리한 강화조건, 특히 랴오뚱반도의 할양은 열강의 의구심을 증폭시켰고 열강의 제동에 일본은 배상금을 얹어 받고 물러났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까지 일본은'절치부심' '와신상담'을 국론으로 삼고 제국주의의 심성을 다졌다. 1930년대의 국수주의는 한 세대 이전인 이때에 다져진 토양 위에서 쉽게 꽃피울수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은 중국·일본·조선에만 영향을 미친 사건이 아니었다. 영국은 이전쟁을 계기로 세계전략과 동아시아 정책을 면밀히 제구성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조선에 함대와 병력을 파견하는가 하면 강화교섭에 효과적으로 개입하기도 했다.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이 전쟁의 결과뿐 아니라 동아시아 대륙에서의 각국의 지위는 물론 전쟁 당사국들의 장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패전 중국은 이 전쟁으로 20세기 전반 역사의 서막을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5년 뒤의 의화단 운동은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의 배외 감정 반제국주의 감정이 민중 중심의 난동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청국의 패전을 일반적으로 봉건적 청 정부의 부패와 군대의 부패등으로 치부되나 이러한 미시적 분석 외에도 이 전쟁의 패전을 단순한 전쟁사의 주제를 너머 역사의 패전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일찍부터 있었다. 즉 일본의 승리는 진보의 승리이며 그 진보는 미국의 제독 페리가 안내한 결과였다. 전쟁을 전쟁에 국한시켜 개전에서 종전까지 다루면서 단절된 시기의 역사로써 해석하는 것이 전형적인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해석할때는 전쟁의 승패만을 가지고 내리는 해석과는 달리 오히려 더 예리하고 공평한 해석에 도달할기 쉽다. 이를테면 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인민들에게 그리고 이웃나라의 인민들에게 가져다 준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이다. 일본은 근대적 혁식으로 국민국가 형성에 성공했고, 청일전쟁에도 승리했으나 기 구성원인 일본의 '국민'은 곧 제국주의 제국의 '신민'으로 편제된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의 제 민족에 대해 '성실함'과 '겸손함'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이다. 이것이 일본을 앞으로 적어도 50년간 끊임없는 전쟁과 전장으로 이 지역에 참화를 몰고 오는 시발점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가속화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이 패전의 역사적 의미는 이렇게 단편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전 후 5년 뒤의 의화단 운동 뿐 아니라 15년뒤 성공한 1911년 국민혁명 모두 역사의 단절이라기 보다는 연속적 의미가 강하기 때문이다. 1919년 5.4지적운동과 20~30년대의 민중운동으로 연장될수 있었던 것은 인구의 90%차지하는 농민-인민문제와 제국주의의 침략문제라는 이중적 모순이 항시 닿아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할을 한 '인민'의 역할의 성공에 대한 평가야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1949년의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현재의 중국에 이르는 20세기 전반 중국과의 연속성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날의 중국은 이른바 대내적 통합과 대외적 주체성을 현재 진행형으로 함께 누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국은 청일전쟁 이후 반세기 동안의 경험을 통해 근대적 의미에서의 '민족' 개념을 재발견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자신의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사적 의미의 '인민'이라고 불리는 계층을 탄생시켰다. 같은 기간 조선 역시 민족의식의 고양과 더불어 '인민'과 '국민'을 아우르는 분열된 역사상을 맺게 된다. 일본인들은 전쟁 이전에 이미 형성된 천황제 '신민'으로서 20세기 중반을 맞는다. 그러나 이러한 신민이 진정한 '시민'으로 변신했는지 단정할수 없다. 현재 일본은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으며 이러한 속에서 '시민'의 역할에 대한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Ⅷ. 결론
1854년 일본의 쇄국체제가 붕괴된 이후, 국제정치 무대에 등장한 일본의 긴급한 현안 과제로 떠 오른 것은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구미 열강의 식민지 투쟁 속에서 어떻게 해야 일본의 독립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무엇보다도 富國强兵과 殖産興業에 힘을 쏟아 빠른 시일 내에 국력을 신장시켜 불평등조약의 철폐라는 당면 외교목표를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로부터 40년 후인 1894년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사이에 두고 기존의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국과 이권 쟁탈을 위해 청일전쟁을 개시해 승리함으로써, 극동의 孤島 일본은 극동의 신흥제국으로 변모했다. 이 청일전쟁은 일본의 위치를 피압박 국가에서 압박 국가로 전환시켰다. 그와 동시에 대국 중국에 이겼다는 자신감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조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약진하는 일본, 팽창하는 일본, 세계의 일본'이라는 의식을 갖게 하였다. 일본 정부는 산업기반의 정비에 착수하고 제철, 철도, 통신, 전력 등 기간산업 발전에 힘을 쏟아 일본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청일전쟁은 동북아정치질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청제국은 이후 열강에 의해 정치적으로 분할되고 경제적으로 침투의 대상이 된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의 각축장이 되어 러일전쟁을 예고하면서 동북아는 열강의 권력정치의 투쟁 장이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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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東鎭, 『日本近代史』, 한길사, 1985.
연민수 편저,『일본역사』, 보고사, 1998.
이노우에 키요시 저, 차광수 역,『일본인이 쓴 일본의 역사(하)』, 대광서림, 1995.
후지무라 미치오, 허남린(역), 『청일전쟁』, 小花, 1997.
희전광의 외, 『중국근현대사』, 일월서각,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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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11
  • 저작시기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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