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현대교회][예배개혁][예배][교회의 사회적 책임][그리스도][성경][하나님]교회의 정의 및 현대교회의 예배개혁과 사회적 책임(교회란, 현대교회의 예배개혁의 실태, 교회의 사회적 책임, 교회,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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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회][현대교회][예배개혁][예배][교회의 사회적 책임][그리스도][성경][하나님]교회의 정의 및 현대교회의 예배개혁과 사회적 책임(교회란, 현대교회의 예배개혁의 실태, 교회의 사회적 책임, 교회, 예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교회란
1. 원어의 의미
2. 성경적 의미
1) 하나님의 사람들
2) 그리스도의 몸
3. 성령의 성전(The Temple of the Holy Spirit)

Ⅱ. 현대교회의 예배개혁의 실태
1.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전통적 예전주의 교회들
2. 성공회와 루터교회--개신교의 예전적 교회들
3.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예전적 성향의 교회들
4. 비예전적 교회

Ⅲ. 교회의 사회적 책임
1. 교회와 사회의 관계
2. 교회의 사회 책임의 방향

Ⅳ. 나가며

본문내용

했던 유대인의 정치적 이상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칸트나 리츌이 이해한 사회와도 구별된다. 그들에게서 사회란 윤리적 사회로서 인간의 도덕성 개발을 통해서 성취하는 목표였다. 더 나아가, 이 사회는 몰트만(J. Moltmann)과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이룩될 수 있는 사회와도 다르다.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된 사회는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의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실현되었으나 미래의 최종적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칭호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갖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의 삶과 일 전체를 통해서 그의 주되심을 이미 실현하였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에게 바침으로써 세상의 주가 되셨으며 죄의 세상을 그의 주되심의 영역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사람들을 그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된 사회는 정치적 질서가 아닌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것은 개혁이나 사회 관계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되심의 실현에 대한 개인의 태도에 대해 묻게 한다. 주되심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에게는 이 사회는 이미 현실로 닦아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와 연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주되심의 사회적 실현인 사회에 현재적으로 참여한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의 사랑을 그들의 삶의 공동체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로 살아야 할 것을 요청 받는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주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시작된 사회를 매개하고 구현함으로써 그것의 발전적 실현에 기여한다. 역사의 미래는 이러한 실현 과정의 최종적 완성이다.
Ⅳ. 나가며
그리스도인들의 실존과 교회의 활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또 하나의 이원론적 근거를 들라면, 그것은 바로 신앙과 실천의 분리이다. 신앙과 실천, 예배와 삶의 분리는 종종 비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위선자, 부정직한 자로 보게 만드는 한 요인이기도 한데, 여하튼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실천을 위해 훈련되어 있지 못하며, 실천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다. 이 점은 앞에서 지적한 그리스도인들의 이원론적인 심성 탓이기도 하겠지만, 종교개혁 이후로 교회가 ‘신앙주의’(Fideism), 아니 ‘신앙제일주의’로 지나치게 치달은 탓이 더 크다고 보여진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오직 믿음 만으로’(Sola fide)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 복음은 율법주의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인간 영혼과 인격의 가치,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지만, 여기서도 그리스도인은 “신앙이냐 행함이냐?”라는 이원론의 덫에 걸려 들었다. “신앙이냐 행함이냐?”라는 양자 택일만이 문제가 아니라, 행함을 단순히 신앙의 부산물로 과소평가한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결과로 인간의 성화(聖化),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참여, 제자의 사명이 소홀히 여겨졌고, 신앙의 위로(慰勞)에만 매어달리는 ‘게으른 정적인 그리스도교’(L. 라가츠)가 생겨났다. 신앙과 행함은 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내면과 외면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관계를 이룬다.
오직 신앙주의는 종교개혁 당시에도 많은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머지 않아 “오직 믿음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sola fides nunquam sola!)고 천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협정신조). 신앙이 구원의 사실적 근거라면, 행위는 구원의 인식적 근거이다(H.G. 푄만). 그러므로 만약 교회가 오직 믿음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면(루터), 믿음은 행위 때문에 서고 넘어진다고 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고(야고보), 행함이 약한 신앙은 결국 병든 신앙이며, 그래서 죽을 수 있는 신앙이라는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견디기 위해서는 ‘주여, 주여’하는 것으로는 안 되며, ‘주를 따르자’는 각오를 가져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 교회는 바로 자신의 안팎에서부터 평화실현을 위해 당장 착수할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한다. 평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리스도인들도 화평케 하는 임무를 맡은 한, 그리스도인들의 임무이기도 하다. 기복적(祈福的), 주술적(呪術的) 신앙이 아니라 실천적, 모범적 신앙만이 복음을 효율적으로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앙이 실천적인 신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히 교회의 생활 구조가 갱신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생활의 심장부는 예배이다. 그러나 심장이 신체의 각 부분에 활력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예배도 이웃 인간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 동기와 동력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날에 한국교회의 활동구조는 대부분 예배구조로만 집중화되어 있다. 큰 교회일수록 교인들 간의 정적인 사귐과 나눔은 두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안팎의 문제를 함께 터놓고 이야기하고 서로 조언하고 실천하는 기회는 희박하다. 교회의 예산과 시설, 활동이 지나치게 예배만을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신앙과 행위, 예배와 삶의 고리를 공동적으로 맺는 절차는 완전히 탈락되어 있다시피 하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교회의 생활구조가 다원화(多元化), 입체화(立體化)되어야 하고, 교회의 결정과정이 민주적이고 공의회적(公議會的)인 구조로 갱신되어야 하며, 예배가 일상 생활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예배 외에도 실천지향적 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대화적 설교’를 자주 행하고, 교인들은 성찬과 애찬의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하며, 교회는 지역사회의 문제를 위해 자신을 개방하여야 한다. 여하튼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간에, 신앙-행위, 예배-생활의 이원론적인 구조를 극복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교회로부터 먼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가 평화실현을 위해 효율적으로 일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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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1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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