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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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비스마르크의 생애

2. 19세기 중반 정치상황과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1) 독일연방의 갈등
2) 철혈정책
3)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그 배경
4) 북독일연방
5) 독불전쟁과 제국 선포

3. 비스마르크의 독일 제국
1) 국내정치의 구조와 투쟁
① 국내 정치구조
② 문화투쟁
③ 사회정책과 사회주의 탄압법
④ 통일 시대의 경제와 사회-관세정책
2)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
① 프랑스 고립주의 정책
② 삼제협상
③ 독일·오스트리아 동맹
④ 삼국동맹
⑤ 재보장조약
⑥ 식민지 획득

4. 비스마르크의 사임과 와해되는 동맹체제
1) 1890. 3 비스마르크 하야(1862~1890)
2) 독 ․ 러 재보장 조약 폐기와 동맹체제의 와해

5. 비스마르크의 의의

본문내용

했던 파행과 굴절의 이면에는 독일제국의 권위주의 전통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 “히틀러라는 악(惡)은 비스마르크에서 비롯된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이념이 아닌 힘의 논리로 파악했다. “큰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鐵)과 피(血)를 통해서 결정된다.”
나폴레옹이 전쟁의 책략가라면 그는 정치의 책략가였다. 정치는 ‘가능성의 미학’이었고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나폴레옹과 같은 정치적 도박꾼이 아니었다. 전쟁이든 정치적 모험이든 단 한 번의 승부에 국가와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았다. 절제를 알았고 한계를 알았다.
“우리는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어찌 등(燈)을 밝혀 과일을 익히려 드는가.”
2) 독·러 재보장 조약 폐기와 동맹체제의 와해
1890년 이후 독일제국의 정치는, 빌헬름 2세의 친정(親政)을 의미하여 빌헬름시대라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은 재무장관 L. 카르리비(재임 1890∼94)하에 사회주의자 진압법의 폐지, 노동자 보호입법의 확충과 농업관세의 인하 등 공업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약간의 정책 수정이 이루어졌다. 황제와 제국 재상 B. 뷜로(재임 1900∼09)는 이 동요를 진정시키고, 지배층의 결집을 기도하기 위해, 농업관세의 재인상과 중공업에 이익이 되는 대함대의 건조를 추진하는 한편, 팽창주의적 세계정책의 전개로 국민의 통합을 도모했다. 그러나 증대되는 군사비의 부담을 둘러싸고 지배층의 내부에도 대립이 생겨 제국 재상 베트만 홀베크(재임 1909∼17)는 이 대립의 타개를 위해 부심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좌우에서 비판을 받게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전야의 독일제국의 내정에서의 최대 문제는 독일사회민주당의 약진이었는데, 이 당은 1912년의 총선거에서 제국의회의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취하는 반체제정당의 내부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서자 개혁주의와 수정주의가 강화되어 변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빌헬름시대에 독일제국 외교의 방향을 설정한 것은 <세계정책(Weltpolitik)>이었다. 정부는 동아시아나 중동에서 적극적 팽창정책을 전개하는 한편, 그 방법으로 대해군의 건설(건함경쟁)과 육군의 증강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과의 마찰을 증대시켜, 1904년 영-프협상, 1907년 영-러협상이 성립, 독일의 고립이 분명해졌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2번의 모로코사건을 일으켰지만, 반대로 영-프의 결속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끝났다.
이와 같은 내외 상황 속에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14년 8월 독일은 제1차세계대전에 돌입했다. 개전과 동시에 한때 사회민주당도 포함하여 거국일치체제가 되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다시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1917년 이후 군부 독재체제가 취해졌지만, 1918년 가을에 패전이 결정적인 것이 되자 11월에 혁명이 일어나 제국주의 체제는 붕괴했다.
5. 비스마르크의 의의
독일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이번 과제를 하기 전까지는 어렴풋이 그의 별명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비스마르크에 대해 알게 된 것 같아서 뿌듯하다.
냉소적이고 권모술수에 능하며, 난폭하고 권위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데다 호전적이며 극단적인 인물! 독일 통일을 이루어 내고, 권위적인 군주제를 지켰으며, 유럽의 새로운 균형 관계를 만들어 낸 장인(丈人) 비스마르크. 실리주의자요 현실주의자였던 철혈 재상은 독일 통일이라는 목표에 이르기 위해 어떤 책략이나 술책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반혁명적 귀족으로서 민주주의 원칙들을 경멸했는가 하면, 독일의 산업 발전을 이루어 냈으며, 유럽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회복지법들을 창시했다. 그는 권력과 투쟁과 전쟁을 좋아했지만,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막강한 제국을 세우고 난 뒤로는 그 힘을 사용하여 더 이상 제국을 확장하기를 거부했다. 빌헬름 2세와 군부, 그리고 많은 독일인들이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비스마르크의 실각은 세계 대전을 향한 걸음의 시초가 되었다.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비스마르크. 그의 뛰어난 외교적 수완과 정치적 능력을 볼 때 그는 분명히 한 시대의 위대한 정치가임이 분명하다.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며,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러나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은 점이나 문화통일,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통해 본 비스마르크의 정치는 독재적인 성격을 띄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좋은 사회정책들이 그에 저항한 사회주의 세력의 반대로 실패했다. 혹자는 비스마르크가 퇴위함으로써 유럽은 힘의 조율사를 잃어버렸고, 결과 두 차례의 대전을 치러야 했다고 주장하지만 비스마르크가 독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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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4.20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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