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공화국의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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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 5공화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제 5공화국의 대외정책
1. 서론

2. 제 5공화국의 시대 배경
(1) 국내 정치 상황
(2) 국제 정치 상황
(3) 국내 정치 구조와 대외정책

3. 제 5공화국의 대외정책
(1) 안보 정책 & 경제 외교
(2) 통일정책
(3) 북방 정책

4. 결론

본문내용

충적 접근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3) 북방 정책
서독이 70년대부터 동독과의 관계에 관한 72년의 기본조약의 체결에 이어 동·서독의 통일이 실현될 때까지 써 왔던 이른바 동방정책을 비유하여 쓰기 시작한 한국의 북방정책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면서도 한반도 안보환경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요 공산권 제국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인정하고 그 바탕위에 대화와 교류를 추진하여 통일을 지향하도록 유도하는 총체적인 외교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북방정책을 중소 와의 관계와 동구권의 주요공산권 제국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겠다.
① 중국소련과의 관계 개선
중·소와 관계는 소련이 70년대 후반기에 남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반해 80년대에는 중국이 미·중국 수교 이후 이른바 현대화 노선을 취하면서 개방적인 자세로 나옴에 따라 한국은 그 관계를 비정치적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진척시켜 나갈 수 있었다. 제5공화국은 초기에서부터 공산국과와의 관계를 개선할 의사를 보였다. 하지만 1983년 9월 KAL기 격추 1983년 9월 1일 미국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던 KAL 보잉 747여객기가 소령영공에 들어서자 소련 극동군관구 방공군 소속 수호이기가 발사한 미사일을 맞고 추락,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사건.
와 버마사태 이후에는 구체적 진전이 나타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한·중 관계는 86년 아시안 게임에 중국이 참가하는 것으로 본격화되었고 87년 10월 중국 공산당 제13차 전국대표회의에서 개혁, 개방정책에 이념적 정당성이 부여됨에 따라 이 관계는 더욱 확대되었다. 1983년 5월 중국 여객기의 피납 사건으로 내한한 대표단이 한국을 정식으로 국호로 호칭 했다는 것과 중국 내 거주하는 교포의 영주 내지 일시 귀국 87명 실현, 1984년 체육교류 국제회의 상호 참가, 친족 상봉 등 진전을 가져왔으며 한중과의 교역은 1982년 총 3억 5천만 달러 1983년 8억 3천만 달러 1984년 14억 달러 등 매년 증가 되어왔다.
한편 소련은 79년 이후 미소관계의 악화와 미중관계수립에 대한 불만으로 동북아 지역에 대한 군사력 증강으로 긴장을 조성하는 정책으로 일관했으며 남북한의 교차승인 문제에 대해서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KAL기 격추사건 이후에도 소·북한간의 관계가 강화되면서 소련은 북한의 통일정책을 계속 지지했고 동북아 내의 한·미·일의 군사블럭 결성을 비난하는 입장을 지속했다. 그러나 85년 2월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소련은 아시아 안보회의를 제의하면서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기본적으로는 북한의 입장에 동조는 했으나 스포츠 분야, 국제 학술회의, 국제회의 등의 참가 등을 통한 부분적 접촉이 재개되었다. 서독이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헝가리와 수교 했던 것과 유사하게 1987년 8월 대한 상공회의소, 헝가리 상공회의소 간의 경제협력 협정 체결을 체결하게 되었으며 1988년 1월 소련은 서울 올림픽 참가 공식 발표함으로써 많은 관계 진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② 동구권의 주요 공산권 제국과의 접촉
동구권 공산권 제국과의 관계는 1962년 월드컵 예선으로 유고 선수들의 한국 첫 방문 이후 81년에 한국의 올림픽 개최결정 이후 추진되어 1983년 7개국(구유고,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헝가리 등)과 교역을 가졌고 인사교류도 11개국 42명에 이르렀고 1984년에는 162명으로 확대 되였으며 1985년에는 254명 1985년 소련과는 1억 3000만 달러 동독은 2700만 달러 1986년에는 소련과 4000만 달러 동독과는 9800만 달러의 교역 확대가 이루어져 실질적인 진전을 불 수 있다.
4. 결론
제 5공화국이 제시했던 외교적 목표는 평화와 번영의 기반확충이라는 기조하에 미일 등의 전통적 우방과 안보 및 경제협력 관계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올림픽을 유치함으로써 국제적인 지위향상을 꾀하고,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 확충이라는 목표를 내세워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등에 외교적 노력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그 내부를 살펴보면 이러한 정책 추진 방향은 전두환 정권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면이 많았다. 제5공화국의 대외정책에서의 중점은 여전히 안보에 있었고, 그 외교스타일은 정상외교에 치중되어 있다. 이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유혈사태를 통한 정권 장악으로 인한 정치권력의 취약성 보완을 국내보다는 외부에서 찾고자 한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즉 대외정책에서의 안보중시 태도와 미일과의 긴밀한 동맹관계 확보라는 방법을 추구하고 잦은 정상외교, 아시안게임, 올림픽과 같은 국제스포츠 행상의 유치에서 이러한 외부적 자원을 통한 정통성 확보를 볼 수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대미의존적 경향을 더욱 짙게 만들게 되었고 이는 외교의 자율성을 크게 손상시키게 됨으로써 한국외교를 냉전체제 속에 더욱 강력히 귀속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에의 의존도 증가와 군사장비 현대화를 통한 적극적인 군비강화는 남북한 간의 군비 경쟁을 또한 과열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물론 신냉전적 분위기 속에서도 제5공화국 정부는 대외관계의 강화를 통하여 내적 지배력 강화를 위해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을 하였다. 이는 이러한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국가자체의 역량이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86년 이후 최초로 국제수지면에서 흑자를 기록하게 되었으며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채택한 가장 모범적인 전후 신생국가의 하나로 평가됨으로써 국제적 위상 역시 강화되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을 통해 올림픽을 유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량의 성장이 미국의 암묵적인 승낙과 지원 하에 이루어 졌다는 것은 여전히 제5공화국의 한계로 보인다.
참고문헌 : 한국외교발전론 (김정원 저) p 217~244
한국외교사Ⅱ (한국정치외교사학회) p417~450 <김영식>
전두환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 (전현준 / 통일연구원 선임 연구위원)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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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7.05.02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7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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