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과 근대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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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A. 실학의 개념

2-A. 실학사상의 형성
1) 실학학파의 분류
2) 중농학파 사상의 형성
3) 중상학파 사상의 형성

2-B. 실학사상의 형성
1) 유형원과 이익의 토지 제도 개혁론
2) 정약용의 토지 개혁론
3) 유형원과 이익의 노비 제도 비판
4) 유수원과 홍대용의 신분 제도 개혁론
5) 박제가의 소비 권장론
6) 북학파의 상공업진흥론
7) 이익의 역사관
8) 한백겸의 동국 지리지
9)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3-A. 실학사상의 전개
1) 중농학파 사상의 전개 과정
2) 중상학파 사상의 전개 과정

4-A. 실학의 근대의식
1) 근대의식의 특징
2) 실학에서의 근대화

본문내용

판하며 풍양 조씨 측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같은 척족세도정치라고 하지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정치색이 다르고 풍양조씨는 북학의 핵심인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것이다.
19세기의 세도정치가 노론 일색의 정국이라고 하지만 이같이 자체 내에서 주도세력과 비판세력으로 갈리면서 비판세력에 속해있던 김정희는 오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학문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 秋史體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완성하였고 이러한 학문적 성과등을 통하여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 학파에서의 중인계층은 상인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므로 이들을 포용하여 북학을 전수한 것은 사회 경제적 발전을 예측한 혜안이라 할 수 있으며, 추사학파에서 사대부층의 제자들이 19세기 후반 초기 개화운동의 핵심세력이 되는 사실도 유의할 점이다.
1863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정권은 북학에 기초한 경세론으로서 중세적 잔재를 탈피하려는 정책을 시도했지만 세양제국주의의 세력으로 인해 쇄국주의를 국론으로 고수하였다. 문호개방이 외세침탈로 이어지던 당시 동양제국의 현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인식이었다. 이어 민씨정권이 탄생하였는데 이 정권의 핵심인물인 민태호나 민규호 역시 추사문하에서 북학을 공부한 사람들로 당시로서는 세계정세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었다.
1873년 민씨중심의 개화정권은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1876년 丙子修護條約을 체결하고 문호개방의 단초를 열었는데, 이즈음부터 기술문명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통로를 청으로부터 일본 내지 구미열강으로 선회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明治維新 이후 빠른 변신을 통해 서양제국주의의 대열에 이미 편입되어 있다는 인식의 결과였다. 결국 이러한 개화사상은 북학 사상에 뿌리를 두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통로를 일본과 구미제국으로 바꾼 것이다.
秋史門下三千士라는 시구에서 보이듯 김정희 문하에서 길러진 많은 북학자들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개화사상으로 전환하여 1870년대부터 개화운동을 전개하면서 초기 개화운동의 추진력이 되었다.
4-A. 실학의 근대의식
1) 근대의식의 특징
실학의 근대의식을 논하기에 앞서 근대의식의 보편적 개념과 그것이 우리 역사발전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검토하여야 한다.
근대란 인류가 중세봉건사회에서 탈피해 현대와 가장 유사한 생활형태를 이룩한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는데 그 특징으로는 첫째, 인간중심주의의 추구, 둘째, 과학적 기술문화의 성취, 셋째,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채택, 넷째, 시민사회의 대두, 다섯째, 민족주의를 내건 국민국가의 형성을 골자로 한다.
2) 실학에서의 근대화
서구 중심적인 관점에서 한국사의 근대화과정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문제를 지님으로 전통 내에서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 후기 실학사상에서 근대의식의 맹아를 추적하는 시도를 하였다.
첫째,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서양은 중세 기독교의 암흑사회에서 휴머니즘의 대각성을 이룸으로써 근대로의 전환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동양은 전통시대 지배 사상이었던 유교가 인간중심의 이데올로기를 골자로 하고 있다는 점이 차별성이다.
둘째, 과학적 기술문화의 성취를 위한 노력은 실학 시대부터 관심이 집중되었으며, 특히 북학파가 이 문제에 열중하였다.
셋째, 경제적인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맹아 문제는, 이미 조선사회 자체 내에 사회변동이 일어나 18세기부터는 자본주의의 싹이 보인다는 연구는 실학과 자본주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다.
넷째, 시민사회의 대두 문제는 지배계급인 양반사대부를 제외한 중인 계층의 성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18세기에 확대된 신분상승운동을 전개하면서 19세기 새로운 시대사상으로 부상한 북학사상을 사상적 기반으로 양반사대부에 대체되는 사회계층으로 성장하여 개화운동의 선봉장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도시의 常人이 상공업에 종사하며 시민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섯째, 민족주의를 내세운 국민국의 문제는 조선후기에서 그 원초적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성리학을 국학으로 한 조신이 양란을 겪으면서 황폐된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내건 이데올로기가 조선중화주의이다. 이는 조선이야말로 문화적으로 가장 우월한 민족국가로서 문화적 적통임을 과시하는 중세적 민족주의가 고착된 것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사항을 종합하여 실학파에 대입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중심주의에는 조선이 국학으로 채택 발전시켜 통치이데올로기로 삼은 성리학 자체가 심성론을 중핵으로 하는 인간중심주의의 사상이다. 과학적 기술문화에의 관심과 성취를 위한 노력은 중상학파의 북학파에서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는 상업공업에 관한 관심이 화폐제도에 대한 관심과 함께 북학파에서 제기되고 있다. 시민계급의 형성은 중인계층이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그 중핵을 이룰 수 있는 소지가 가장 많았고, 이들이 변화하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북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19세기에 급성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도시소시민에 대한 관심이 북학파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운 국민국가의 형성은 조선성리학 단계에서 이미 의식의 일단을 보이고 있다.
이상 서구에서 말하는 근대의 개념에 속하는 제특징을 실학파에 대입시킨 결과 인간중심주의는 성리학의 핵심 되는 사상적 틀이고 중세적 민족주의 또한 성리학단계에서 보이고 있다. 다만, 과학적 기술문화와 자본주의,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은 북학파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실학을 근대지향의식과 민족의식에 투철한 학풍이라고 한계 짓는다면 북학사상이 여기에 가장 근접된다.
5-B. 실학의 발달
1) 실학의 발생
17 18세기에 벌열정치가 행해지면서 소수 양반가문이 정권을 독점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몰락 양반들이 발생하였다. 농촌에서는 광작에 의한 부농이 생기는 한편 영세농민들은 이농을 강요당하여 유민의 수가 늘어났다. 도시에서는 도고상인들이 상공업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하자 영세상인들은 몰락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등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에 따르는 갖가지 사회 모순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 같은 사회적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학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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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5.16
  • 저작시기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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