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매월당 김시습][금오신화]매월당 김시습 심층 고찰(김시습의 생애와 사상, 김시습의 문학, 김시습의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김시습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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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시습][매월당 김시습][금오신화]매월당 김시습 심층 고찰(김시습의 생애와 사상, 김시습의 문학, 김시습의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김시습의 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김시습의 생애와 사상
1. 생애
2. 사상
1) 유교사상
2) 불교사상
3) 도교사상

Ⅱ. 김시습의 문학
1. 소설 『금오신화』
1)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2) 이생규장전 (李生窺墻傳)
3)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4) 남염부주지 (南炎浮州志)
5)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2. 시

Ⅲ. 나가며

본문내용

게 농사를 지으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훈구귀족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농민들에게 과도한 조세를 부과하여 수탈하였던 것이다. 김시습은 농민들의 각종 참상을 목격하고서 가장 분개한 것은 바로 이러한 租稅收奪이었다.
Ⅲ. 나가며
김시습은 어렸을 때부터 영민한 천재였다. 이미 매우 어릴 때부터 시를 지을 줄 알았고, 오세 때 세종 앞에 나아가 시를 지었다는 일화는 얼마나 그가 문학과 밀접한 연관을 맺은 인물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다시 굴곡진 삶을 지내다가, 28세에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에 왔다고 하는데 이때 전등신화를 얻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전등신화가 국내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와 경로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전등신화의 기록이 처음으로 보이는 것도 김시습의 <제전등신화후>가 최초이다. 김안노의 용천담적기에 보이는 바로 보면 적어도 김시습 출생 이전인 조선조 초기에는 들어왔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는 연간 3-4차에 걸친 공식 사절이 중국을 왕래했던 때니 당시 명의 독서계를 경탄 속에 휘몰았던 전등신화가 사신들의 손에 의해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곧 전등신화의 간행이 영락19년(1421년)이요 김시습의 생존 기간이 1435-1493년이니 김시습이 금오신화의 저작 시기로 보이는 금오산 칩거 시기(1465-1470년경)로 보면 전등신화가 나오고 불과 50년 정도 만에 금오신화가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등신화의 수입시기는 조선조 초기로 미루어 볼 수 있다.
정치와 학문이 분리되지 않고, 문학이 출세의 수단으로 되어있던 당시 지배층 학자들의 문학관에서 김시습이 벗어나게 된 것은 그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오랜 시작생활에서 차츰 독자적인 문학의식이 싹튼 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생을 마칠 공간으로 금오산을 선택한 후, 금오신화를 창작한 그의 심적 동시는 <제금오신화후>라는 시에서 발견되는 바이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矮室靑氈暖有餘 陋屋에 방석자리 오히려 따뜻하고
滿窓梅影月明初 창가에 비친 梅影 달이 막 밝았구나
挑燈永夜焚香坐 등불을 돋우고 단정하게 앉아서
閑著人間不見書 세상에서 못보던 책 한가로이 짓는도다
玉堂揮翰已無心 玉堂에서 글지을 마음 벌써 사라지고
端坐松窓夜正深 松窓에 앉았자니 밤은 정히 깊었구나
香揷銅甁烏淨 구리병에 향 꽂히고 안상은 조촐한지라
風流奇話細揷尋 風流奇話를 자세히 더듬는다
금오신화가 쓰여진 분위기와 심적 상태가 서로 표현되어 있다. 옥당에서 글을 지을 마음이 사라졌으니 글 속에서 옥당을 지어보자는 마음이 곧 작품을 쓰는 마음이다. 30대의 젊은 시절, 현실의 번민과 초탈의 중간 단계에 있었던 그는, 새로운 의식세계를 가다듬어 나가는 것이다. <취유부벽정기>와 <남염부주지>가 각각 세조 10년과 11년에 쓰여진 것은 작품을 쓰던 시기와 동대의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특히 매월당은 전기소설의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시인으로서도 그 명성이 드높았던 바, 전기소설에 잡입된 시사들은 이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바이다. 김시습과 절친한 친구관계였던 남효온(1454-1492)이 남긴 사우명행록에 따르면 그의 시는 수만여편에 이르나 거의 산일되었다고 했고, 허목(1595-1682)의 미수기언에 따르면 매월당의 저술로 시편을 제외하고도 약 1800여편이 전한다고 하고 있다. 현존하는 매월당집 전체 23권 중 15권이 시집이며, 여기에 수록된 시사가 2,200여편에 달한다는 것도 그가 얼마나 시작을 좋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특히 정주동 교수는 이와 관련하여 매월당집에 수록된 작품을 체계적으로 분리해, 그의 경향을 밝혀낸 바 있는데, 그는 산문보다는 시를, 고체보다는 근체를, 절구보다는 율시를, 오언보다는 칠언을 선호했던 것으로 밝혀내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시체에 능란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시작은 자신을 표현하는 한 방식으로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의 인품과 문학에 대한 평가는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허하곡봉이 이문순공 황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은 매월당이 중옷 입은 것을 가지고 볼 것이 없다고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매월당이 세상을 도피한 절개는 진실로 중용의 도리에는 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몸가짐이 청고한 데 합하고 물러감이 권도에 합했다고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는 물음에 답하기를, 매월당은 일종의 이인으로 색은행괴에 가까운데 마침 그러한 때를 만나서 드디어 그 높은 절개를 이루었을 뿐이요 하였다. 이에 반해 율곡은 매월당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김시습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의 재주가 그릇밖에 넘쳐 능히 스스로 잡지 못했으니, 그 기 받은 것이 경청한 것에는 풍성하고, 중후한 데에는 인색하였던 것이 아닌지요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절의를 표방하고 윤기를 붙들었으니, 그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일,월과 빛을 다툴 것이고, 그 풍성을 들으면 나약한 사람이라도 또한 듯을 세울 수가 있은 즉, 비록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비슷할 것입니다.
이러한 면이 조기영편 생육신전에서는 “대개 구우의 전등신화를 도습했지만 출어가 전등신화보다 뛰어나니 어찌 다만 청출어람에 그치겠는가” 하여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안로(연산조 1481-1537) 의 용천담적기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동봉 김시습이 어릴 적부터 벌써 시를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번잡한 것을 벗어버리고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서 이름을 설잠이라고 고쳤다.…중략… 시가 정중하여 소순기가 적었다. 금오산에 들어가 글을 지어 석실에 감추어 두고 말하기를,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글이 대개 기이한 것을 기록하여 뜻을 붙여 전등신화 등 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금오신화의 가치와 전등신화와의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이 널리 유포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이러한 작품에 대한 비판은 곧 사라지고 이후 그는 생육신으로서 유자들에게 존경받게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문학적 성향이 작품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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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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