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운동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항일학생운동의 배경과 원인

Ⅲ. 1920년 중반 본격적 반일 맹휴와 학생운동
(1) 본격적 반일 맹휴투쟁
(2) 고양되는 노동운동과 청년학생운동

Ⅳ. 광주 반일학생운동의 전개
(1) 성진회
(2) 독서회중앙본부의 결성
(3) 1929년 광주 11월 항쟁의 전개
(4) 서울의 12월 투쟁과 전국적 운동의 파급
(5) 일제의 대응과 운동의 결말

Ⅴ. 광주 반일 학생운동의 의의

Ⅵ.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동시에 징계가 내려지고 또 대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특징이었다.
광주학생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학교당국의 학생징계는 1920년대 중후반 맹휴학생 징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가령 운동이 발발한 광주지역은 2차시위투쟁 직후 각 학교별로 참가학생들을 대량으로 징계하였다. 반면에 서울은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는 초기부터 대량징계를 한 것 같지는 않다. 학생징계가 보다 엄해진 것은 1930년 1월 16일 정무총감 관저에서의 회합 이후부터였다. 조선총독부가 학생운동을 사회운동준소요상황으로 인식하면서 개별 학교의 학생징계에 강경한 태도로 개입하였다.
첫째로 폐교 위협이다. 그 실례로 사태가 진정되지 않을 경우 학무국장은 2,3개의 학교가 폐교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경고 대상은 서울의 투쟁을 주도한 사립학교들이었다.
둘째로 조선총독부가 학생징계의 수위와 처벌대상자를 지시했다. 학무국장이 학생시위로 구금자가 발생한 학교의 교장들을 소집하여, 출감하는 학생들 전부를 무기 또는 유기정학을 시키고 그 중에서도 심한 학생은 단호한 처지, 곧 퇴학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셋째로 학생들의 재교육 및 진학 기회를 박탈했다.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에 지시를 내려 시위투쟁에 참가한 학생들의 상급학교 진학과 전교를 제한했다. 그 뒤 1927년과 1928년에도 지원자의 ‘소질, 곧 학력인물가정상황’ 등을 신중히 조사하여 가부를 결정하도록 했는데, 맹휴의 원인을 2,3 불량학생의 교사에 의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해주에서는 지원자의 형이 ‘해주중학교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출신학교의 교장이 소견서 작성을 거부하고 이로 인해 입학원서를 쓰지 못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처럼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학생징계는 매우 가혹하였다. 무기정학 이상을 받은 학생만 2,912명이었다. 약 5개월간의 학생시위로 학교에서 배제된 학생 수는 맹휴가 최고조에 달했던 1928년 한 해 동안 처벌받은 학생보다 많았다.
더욱이 이 학생들 중에서 학교로 돌아간 수는 1,8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1928년의 맹휴로 징계된 학생들을 구제한 조선총독부의 처리와도 비교되는 처사였다. 맹휴학생들에 대한 처벌이 사회문제로 되자, 조선총독부는 1928년 11월 10일 소화 천황의 즉위례를 계기로 삼아 맹휴로 징계된 학생들의 구제방안을 발표했다. 그나마 학생들의 희망대로 복교된 것도 아니고 시행과정에서 서약서 제출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처벌된 학생들의 징계를 해제하고 희망자에게 복교를 허용한다는 조치였다. 결국 광주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1,000여 명 이상의 학생들은, 학교로부터 주모자들을 배제한다는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신, 「조선총독부의 광주학생운동 인식과 대응」, 연세대, 2005년,
Ⅴ. 광주 반일 학생운동의 의의
광주 학생들의 투쟁을 비롯한 1920년대 청년학생들의 대중운동은 선진적인 지도조직의 영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나 분산성을 면치 못했으며,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과도 밀접히 결합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광범위한 청년학생들과 민중들 속에 반일 애국정신을 적극 고취시켰을 뿐 아니라 반일투쟁에서 조선 청년학생들의 굳센 기개를 떨쳤다.
탄압과 폭압에 굴하지 않고 장기항전을 벌였다는 점에서 당시 학생들의 높은 의지와 순수한 열정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잊혀지지 않고 계속 희망을 안겨주는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우리 민족 내부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초기 일본 학생들과의 충돌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피압박 민족의 해방과 침략자 타도투쟁으로 나아가 1930년대 운동의 새로운 발전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광주학생운동이 아직 진정서, 요구서 제출, 격문 확산, 맹휴, 거리투쟁 등의 한계를 보임으로써 무장한 일제에 맞서 단호한 투쟁을 벌이지 못한 한계가 있었지만, 광주학생 민족해방운동 이후 학생들 사이에 결사조직을 늘려 반제국주의 투쟁을 더욱 더 강화시켰고,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에 기초하여 보다 목적의식적인 전 민족적 무장투쟁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로부터 더 이상 단순한 항의에 의존하거나 학생들만의 투쟁으로는 일제를 이겨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됨으로써 항일 투쟁은 새로운 차원의 민족해방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었다. 이정식, 『새로운학생운동사』, 도서출판힘, 1993년, 114~115쪽.
Ⅵ. 맺음말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히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투쟁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조사를 통해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적이었으며, 모든 민족들의 운동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부분에서 우리는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중고등학교 때의 배운대로 3 1운동과 6 10만세운동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929년 11월 3일 일본 제국주의의 가혹한 착취와 압박에 항거하여 광주 애국 학생들의 항일 독립운동의 봉화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 학생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국가, 나라, 민족과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독립에 대한 신념과 용기를 일으켜 희망을 안겨준 이 위대한 운동은 우리 민족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1. 책
역사학연구소,『함께보는 근현대사』, 서해문집, 2004년.
이정식, 『새로운학생운동사』, 도서출판힘, 1993년.
이기홍 유고 / 안종철 정리,『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학생독립운동이었다.』향지사, 1997년.
2. 논문
김성민, 『한국근현대사연구 2004년 겨울호 제31집』, 「1920년대 후반 서울지역 학생운동의 조직과 성격」, 2004년.
김성보, 『역사비평』,「광주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청년 학생조직」, 역사문제연구소, 1989년.
김혁, 「일제하의 광주학생운동에 관한 연구」, 원광대 대학원, 2001년.
김동춘, 『역사비평』, 「1920년대 학생운동과 맑스주의」, 역사문제연구소, 1989년.
장신, 「조선총독부의 광주학생운동 인식과 대응」, 연세대, 2005년.

키워드

  • 가격1,5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7.07.02
  • 저작시기2007.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867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