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인들에게 신도란 과연 무엇일까? 하이퍼 시대를 사는 일본인들의 다양한 의식 및 신도 자체의 다양한 전통,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 정치, 종교, 문화적 제요소로 인해 이런 물음에 대해 일관성있는 답변을 내리기란 용이하지 않다. 우리는 다만 신도의 향방과 관련된 몇몇 징후들을 포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를 위해 가령 야스쿠니 문제, 천황제 문제, 일본인론에 나타난 신도적 요소 등에 대한 간략한 고찰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야스쿠나 문제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에 건립되었으며 초기에는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라 불리웠다가 1879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서 야스쿠니(靖國)란 '평화로운 나라'(安國)라는 의미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신사에는 현재 군국주의 시대에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수백만 전사자들 및 전범들을 가미로서 제사지내고 있다. 별격관폐사로 지정되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후 여느 신사와 마찬가지로 종교법인이 되었으나 신사본청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야스쿠니 신사가 민간 종교단체로 탈바꿈한 이후 최초로 1952년 천황이 신사참배를 하고, 1975년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수상이 종전기념일(8월 15일)에 개인자격이라 하지만 총리대신으로서는 최초로 신사참배한 데에 이어 1984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수상이 정월 초에 공식적인 연두참배를 한 이래 지금까지 매년 수상과 각료들의 공식, 비공식 참배가 이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 자민당의 '유가족 의원협의회'에 의해 이른바 '야스쿠니 신사법안'이 작성된 이래 야스쿠니 국영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됨으로써 일본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논쟁의 불씨가 되어 왔다.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에 비해 야스쿠니 국영화의 문제는 찬반양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큰 흐름을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나라를 위해 순국한 자들을 나라가 신경써서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므로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는 관철되어야 한다는 입장(유족회, 신사본청, 우익계)
(2)야스쿠니 신사는 단순한 신사가 아니라 과거 국가신도적 천황제 및 군국주의 일본의 핵심부에서 기능했던 만큼 그 국영화에 대해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무라카미 시게요시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 재일조선인 단체, 사회당과 공산당 등의 좌익계)
(3)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는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 위헌적인 것이므로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신도계를 제외한 대다수의 종교계)
요컨대 야스쿠니 문제를 둘러싼 미묘한 역사적, 정치적 쟁점들을 규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는 야스쿠니 문제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일본사회의 종교, 사상, 교육, 문화, 생활의식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야스쿠니 신사의 초혼관념은 어령(御靈)신앙 즉 중세 이래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인간이 사후에 탈이나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미로 제사지내야 한다는 종교적 관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어령신앙은 앞서 언급한 텐만텐진 신앙 뿐만 아니라, {평가물어}(平家物語)와 같은 일본고전문학 및 노(能)라든가 가부키(歌舞伎) 등의 전통예능에까지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는 대중적 관념이기 때문에,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현대 일본인들의 반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폭넓은 고찰이 필요하다.
2. 천황제 문제
이와 같은 야스쿠니 문제 못지않게 천황제 문제 또한 대단히 미묘하다. 천황제의 전과 있는 과거, 상징천황제가 갖는 애매성, 그리고 황실신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재정적 지원이 위헌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의 7,80 퍼센트는 천황제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면 현대 일본의 천황제는 중세 이래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던 막부와 황실의 공존 즉 현실적인 권력은 막부의 장군이 쥐고 있고 천황은 정신적 구심체로서 기능했던 이중적 구조와 유사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일본의 미래는 확실히 천황제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3. 일본인론
한편 오늘날 일본사회에서는 이른바 '일본인론'이라는 장르에 속한 책들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여기서 일본인론이란 일본사회문화와 국민성의 특징을 주제로 하는 언설을 가리킨다. 일본인론의 원형은 앞서 기술한 고학신도(국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일본인론이 가장 성행했던 것은 1930년부터 패전전까지의 군국주의 시대였다. 그 때의 일본인론은 물론 기기신화에 입각하여 일본과 일본인의 우월성을 극도로 강조한 국수주의적인 일본인론이었다. 패전 이후에는 일본인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는 일본인론이 등장했지만, 80년대를 넘어서면서 경제대국으로의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일본인들 사이에 다시금 긍정적인 일본인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긍정적인 일본인론은 과거와 같은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는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외래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깔면서 서양적인 것에 대한 일본적인 것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이 때 말하는 일본적인 것의 내용으로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도이다. 가령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신도를 애니미즘적인 '숲의 사상'으로 규정하면서 거기서 인류의 미래적 가능성을 찾고 있으며,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는 지금이야말로 신도 복권의 때라고 소리높여 주창한다. 사에키에 의하면, 전후 오랫 동안 신도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는 잘못된 신도관이 통용되어 왔는데, 이는 연합국 점령군에 의해 살포된 것에 불과하며 원래의 신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원래의 신도는 그렇게 공격적이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서 벗어난 유연성을 특징으로 하며, 특히 자연과의 교감과 일체감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인들에게 신도란 과연 무엇일까? 하이퍼 시대를 사는 일본인들의 다양한 의식 및 신도 자체의 다양한 전통, 그리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역사, 정치, 종교, 문화적 제요소로 인해 이런 물음에 대해 일관성있는 답변을 내리기란 용이하지 않다. 우리는 다만 신도의 향방과 관련된 몇몇 징후들을 포착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를 위해 가령 야스쿠니 문제, 천황제 문제, 일본인론에 나타난 신도적 요소 등에 대한 간략한 고찰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야스쿠나 문제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에 건립되었으며 초기에는 동경초혼사(東京招魂社)라 불리웠다가 1879년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여기서 야스쿠니(靖國)란 '평화로운 나라'(安國)라는 의미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신사에는 현재 군국주의 시대에 천황을 위해 싸우다 죽은 수백만 전사자들 및 전범들을 가미로서 제사지내고 있다. 별격관폐사로 지정되었던 야스쿠니 신사는 패전후 여느 신사와 마찬가지로 종교법인이 되었으나 신사본청에 소속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야스쿠니 신사가 민간 종교단체로 탈바꿈한 이후 최초로 1952년 천황이 신사참배를 하고, 1975년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수상이 종전기념일(8월 15일)에 개인자격이라 하지만 총리대신으로서는 최초로 신사참배한 데에 이어 1984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수상이 정월 초에 공식적인 연두참배를 한 이래 지금까지 매년 수상과 각료들의 공식, 비공식 참배가 이어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67년 자민당의 '유가족 의원협의회'에 의해 이른바 '야스쿠니 신사법안'이 작성된 이래 야스쿠니 국영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됨으로써 일본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논쟁의 불씨가 되어 왔다.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에 비해 야스쿠니 국영화의 문제는 찬반양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 큰 흐름을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나라를 위해 순국한 자들을 나라가 신경써서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므로 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는 관철되어야 한다는 입장(유족회, 신사본청, 우익계)
(2)야스쿠니 신사는 단순한 신사가 아니라 과거 국가신도적 천황제 및 군국주의 일본의 핵심부에서 기능했던 만큼 그 국영화에 대해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무라카미 시게요시를 비롯한 일군의 학자들, 재일조선인 단체, 사회당과 공산당 등의 좌익계)
(3)야스쿠니 신사의 국영화는 신앙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 위헌적인 것이므로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신도계를 제외한 대다수의 종교계)
요컨대 야스쿠니 문제를 둘러싼 미묘한 역사적, 정치적 쟁점들을 규명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우리는 야스쿠니 문제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며, 일본사회의 종교, 사상, 교육, 문화, 생활의식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예컨대 야스쿠니 신사의 초혼관념은 어령(御靈)신앙 즉 중세 이래 생전에 원한을 품고 죽은 인간이 사후에 탈이나 재앙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해 가미로 제사지내야 한다는 종교적 관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어령신앙은 앞서 언급한 텐만텐진 신앙 뿐만 아니라, {평가물어}(平家物語)와 같은 일본고전문학 및 노(能)라든가 가부키(歌舞伎) 등의 전통예능에까지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는 대중적 관념이기 때문에,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현대 일본인들의 반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폭넓은 고찰이 필요하다.
2. 천황제 문제
이와 같은 야스쿠니 문제 못지않게 천황제 문제 또한 대단히 미묘하다. 천황제의 전과 있는 과거, 상징천황제가 갖는 애매성, 그리고 황실신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재정적 지원이 위헌적인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인의 7,80 퍼센트는 천황제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면 현대 일본의 천황제는 중세 이래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던 막부와 황실의 공존 즉 현실적인 권력은 막부의 장군이 쥐고 있고 천황은 정신적 구심체로서 기능했던 이중적 구조와 유사한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일본의 미래는 확실히 천황제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
3. 일본인론
한편 오늘날 일본사회에서는 이른바 '일본인론'이라는 장르에 속한 책들이 널리 읽혀지고 있다. 여기서 일본인론이란 일본사회문화와 국민성의 특징을 주제로 하는 언설을 가리킨다. 일본인론의 원형은 앞서 기술한 고학신도(국학)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일본인론이 가장 성행했던 것은 1930년부터 패전전까지의 군국주의 시대였다. 그 때의 일본인론은 물론 기기신화에 입각하여 일본과 일본인의 우월성을 극도로 강조한 국수주의적인 일본인론이었다. 패전 이후에는 일본인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는 일본인론이 등장했지만, 80년대를 넘어서면서 경제대국으로의 고도성장을 배경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일본인들 사이에 다시금 긍정적인 일본인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긍정적인 일본인론은 과거와 같은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에 대해서는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외래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깔면서 서양적인 것에 대한 일본적인 것의 우위성을 강조한다. 이 때 말하는 일본적인 것의 내용으로서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도이다. 가령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신도를 애니미즘적인 '숲의 사상'으로 규정하면서 거기서 인류의 미래적 가능성을 찾고 있으며, 사에키 쇼이치(佐伯彰一)는 지금이야말로 신도 복권의 때라고 소리높여 주창한다. 사에키에 의하면, 전후 오랫 동안 신도를 모든 악의 근원으로 보는 잘못된 신도관이 통용되어 왔는데, 이는 연합국 점령군에 의해 살포된 것에 불과하며 원래의 신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원래의 신도는 그렇게 공격적이거나 위험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적 경직성에서 벗어난 유연성을 특징으로 하며, 특히 자연과의 교감과 일체감을 핵심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