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백범][김구][독립운동가]백범 김구(민족사상, 정신과 조국 독립에 대한 신념, 민주주의론, 독재에 대한 반대, 통일운동)(백범 김구, 백범 김구의 민족사상, 백범 김구의 정신과 조국에 대한 신념)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백범 김구][백범][김구][독립운동가]백범 김구(민족사상, 정신과 조국 독립에 대한 신념, 민주주의론, 독재에 대한 반대, 통일운동)(백범 김구, 백범 김구의 민족사상, 백범 김구의 정신과 조국에 대한 신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백범 김구

2. 백범 김구의 민족사상

3. 백범 김구의 정신과 조국에 대한 신념

4. 백범 김구의 조국 독립에 대한 신념

5. 백범 김구의 민주주의론과 독재에 대한 강력한 반대

6. 백범 김구의 통일운동

본문내용

그 결과가 사회에 의혹을 야기하는 과임은 물론이요, 또한 신문제작상 신중을 요하는 기사의 취재와 정리에는 반드시 책임자와 사전 연락이 있어야 할 직분에 충실치 못하였다는 것을 밝히어 그 관계기자를 처벌함으로써 본 사건 처리에 대한 본사의 사의를 표하려 합니다.
사과문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불경’부분만 강조되어 언급되고 있다. 당시 김구, 김규식과 함께 ‘영수’로 불리는 것조차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던 이승만의 심기를 고려한 사과문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에 대한 사과의 말은 전혀 없다. 만약 한독당이나 김구 측에서의 항의가 있었다면 그런 보도문을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도진순이 오보로 지적하고 있는 두 기사는 내용적으로 김구의 노선변화를 보여주는 지표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편, 김구와 이승만이 만나기 하루전인 1949년 5월 18일 한독당에서는 조국전선 결성제의를 토의하기 위한 중앙상무위원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의 결과 한독당은 담화를 발표하여 조국전선 결성을 비판하였다. 한독당은 조국전선은 신형태의 ‘민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북한측이 주장하는 연석회의에 대하여, 해주의 ‘남북협상’과 같은 방식의 남북협상(2차협상을 지칭)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으로 주장하고, 남과 북의 좌익이 협상한다는 것은 좌익에 관한 문제라고 그 의의를 축소 평가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추진하는 남북협상에 대해 “미소의 협의로써 절대자유분위기가 달성된 뒤에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서울에 회합하여 남북평화통일에 관한 협의를 하여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김규식 측도 “북한은 타협을 부정하는 집단”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익이 될 때만 타협을 제시한다”고 인공 측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좌익이나 인공 측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나 협상의 완전한 포기로 해석할 수는 없다. 즉, 김구의 노선 전환은 남과 북 두 개의 정부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남한 내의 정치활동 재개로 무게 중심을 옮기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측과의 협상과 관련하여 내용이야 어쨌든 김구, 김규식과 북 측은 1차협상 이후 비공식적으로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김구가 확인하였듯이 제2차협상 제의는 당연히 전달되었지만, 그 외에도 제3차 유엔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에 있어서 당시 신문은 단순히 중간파만의 단독적 행동이 아니라 남북공산파와의 연락 하에 진행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조국전선 결성제의를 김규식에게 전달하려던 서중석의 동생 서완석과 홍명희의 아들 홍기무가 체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김규식의 측근 김태양은 1949년 3월 북로당의 비선 성시백을 통하여 북측의 남북제정당지도자협의회에 관한 제안을 전달받고 김구, 김규식을 설득했다.
당시 조국전선 결성에 대한 김구, 김규식 측의 비판적 견해에 대하여 “북한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진행될 협상에 대한 양 김씨 측 견해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양 김씨 측의 협상방법론에는 남한정계 수습에 관한 문제”가 고려되고 있는 것이 여실히 엿보인다는 당시의 평가는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1949년 초반을 넘기며 서서히 남한정계에의 편입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남북협상론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구축하려는 시도도 여전히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통촉의 결성과정에서 민전세력을 배제한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양면적인’ 태도는 1948년 12월의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승인을 고비로 하여, 1949년 5, 6월에 이르면 결국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까지 전환되었다. 양 김씨는 명백하게 남한 정치 우선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즉, 남북협상보다는 민족진영강화가 더 급선무로 떠 오른 것이었다. 민족진영강화론 또한 통일운동세력의 확대라는 목표보다는 정계복귀의 의도가 더욱 크게 반영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는 김구의 암살 원인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하나의 뚜렷한 시각은 당시 남과 북에서 전개된 새로운 통일협상에 김구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를 두려워한 매국세력들이 저지른 소행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시각은 다가올 선거를 앞두고 태풍의 눈이 될 최대의 정적에 대한 사전제거라는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두 경우 다 어느 한 쪽의 원인이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단지 무게 중심이 어느 한 쪽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발견된 미군 측의 자료는 미국이 김구의 암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하고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아 흥미롭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장교인 조지 실리(George E. Cilley) 소령이 김구 암살 3일 후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해 7월 1일 미 육군 일반 참모부 정보국장 앞으로 보낸 문제의 보고서는 암살범 안두희가 주한 미군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다가, 나중에 정식 요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미국은 김구가 공산주의와 결합되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물론 미국이 김구를 그렇게 평가했다는 것과 실제 김구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위에 언급한 미국 측 문서에서도 김구가 군부 내 우익조직들을 동원해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쿠데타의 주요 음모자의 한 사람인 염동진이 쿠데타 성공 후 북한장교들에 대한 배척과 38 이북으로의 진격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시기 김구의 노선은 그것이 설사 쿠데타와 연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분명 북조선과의 협상보다는 남한 정계복귀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1949년 중반기 이미 극우 반공체제의 기본 틀을 마련하고 있던 이승만은 당연히 김구의 복귀에 더 큰 위협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승만세력의 흐름과 공산주의와 연결된 쿠데타에 의한 이승만정부의 붕괴를 우려하는 미국의 이해 사이에 김구의 죽음이 있었다. 아직 까지 김구의 암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한 사실을 밝혀줄 자료는 없다. 정황적으로 미군은 묵인과 방조를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김구의 마지막 노선은 미완인 채로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7.07.11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0119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