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핵심사상,가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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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출생

2. 초년기

3. 중년기

4. 만년기

5. 사망

시대적 배경

사상의 개관 / 핵심사상

저서

생애와 인간상

업적, 배울 점

일화

참고도서

본문내용

른의 엄한 법도를 알면서도 미리 아뢰지 않은 것은, 창양을 출산했을 때 '우리 집에 이 보다 더한 경사가 없다.'라고 기뻐하였으므로 증손자를 위한다면 어떤 일이든 묵인해 주리라 믿고 나중에 알리려고 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 일을 알고 엄히 꾸짖고 중지시키고 '근사록'의 말을 인용하면서 편지를 썼다. "몇 달 동안만 밥물로 키운다면 이 아이도 키우고 서울 아이도 구할 수 있다. 어린 아이를 떼어놓고 가는 그 어미의 마음은 오죽하겠으며 서울까지 가는 동안에 이 아이는 죽고 말 것이고 젖도 막히게 될 것이다.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어미가 자식 키우는 정은 짐승도 마찬가지인데 학문을 한다는 유가의 체통으로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더냐! 몇 달을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더 자랄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그 때 가서 데리고 가도록 하마."하고 손자를 타일렀다. 그 후 겨울과 봄은 어렵게 넘겼지만 창양은 증조부를 보지도 못한 채 1570년 5월 23일 죽고 말았다. 퇴계는 그 아픔을 가족들에게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으나, 여러 문인들에게 아픈 심정을 여러 번 토로하였다. 퇴계의 인간 평등사상은 당신의 증손자를 잃으면서까지 하인의 딸을 살렸고, 어미가 자식을 키우는 사랑과 천륜은 사람의 귀천에 차별이 없음을 행동으로 가르쳐 주었다.
9. 퇴계의 자기 반성
퇴계는 매일 일기를 썼던 것 같은데 전해지는 일기는 극히 일부분 뿐이다. 그러한 가운데 퇴계언행록에는 일기를 보충할 만한 자기반성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다.
1) 내가 한번은 금문원의 집에 갔는데, 산 기슭이 매우 가파라서 갈 때는 고삐를 꽉잡고 조심조심 하였으나, 돌아올 때는 얼큰히 취하여 길이 험한 것을 깜빡잊고 탄탄대로인양 안심하고 왔다. 마음을 채근하고 버림이 이와 같으니 두렵지 아니한가.
2) 나는 과거에 여러번 응시하였으나 처음에는 합격 불합격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다. 스물 네 살 때에 연거푸 세 번을 낙방하였으나 역시 큰 상심은 아니 하였는데, 하루는 집에 있자니까 누군가 "이서방, 이서방"하고 부르는데 가만히 보니 늙은 종이었다. 그리하여 문득 탄식하기를 내가 아직도 이름 밑에 아무런 호칭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욕을 보는구나 생각하고 갑자기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바뀌니 두렵지 아니한가.
3) 내가 처음 과거에 합격하던 해에 여러 사람에게 이끌려 날마다 술마시고 놀러 다니느라 조금도 겨를이 없었다. 밤에 돌아와서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즈음에 와서는 다시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어 그러한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4) 번잡하고 흥겨운데서 사람의 성정이 바뀐다. 내가 사인으로 있을 때, 어느 잔치 자리에서 기생들이 눈 앞에 가득이 있어서 문득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생겼다. 비록 힘써 욕망을 억제하여 구렁텅이로 빠지는 지경은 면하였으나 이러한 기회가 바로 살고 죽는 갈림실인 것이다. 어찌 조심하지 않을손가.
10. 과거 공부와 서원 교육
이황은 관학인 향교와 국학은 나라의 제도와 규정에 얽매이고 과거 공부에 주력하여 옳은 학문을 이룰 수 없는 반면, 서원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출세주의와 공리주의를 떠나 순수한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림들의 출세 방법이 과거를 통한 벼슬밖에 없었던 당시에 개인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위주로 하는 성리학의 학문관을 토착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이황의 아들 손자조차도 과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강학하던 당시에 영주에는 과거 공부를 전문으로 지도하는 사설 학원이 있었다. 이 학원은 인격 함양이나 학문이 목적이 아니라 과거에 대비하는 교육이 주목적이었다. 오늘날의 진학지도 학원 같은 성격을 띤 사설 학원이었던 것이다.
이황의 손자 안도도 이곳을 찾아간 적이 있어서 이황은 문장 수련에 힘을 쓰는 손자를 나무라기까지 하였다. 이황이 유교 경전과 성리학 서적을 중심 교재로 삼아 강의하는데 반해서 영주의 사설 학원에서는 과거 위주의 암키와 작문을 주로 가르쳤다. 손자가 조부의 교육을 이해하지 못하자 이황은 하도 딱해서 "가까이 있는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쓴 돌배 따러 온 산천을 헤매고 있구나."라는 시를 보여 주며 손자를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아들 준도 부친의 강학보다 영주의 학원에 가서 공부하는 것을 원했다. 이황은 내심 못마땅해 하면서도 허락했는데, 준은 곧 아버지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되돌아왔다. 이황의 실천중심의 학문,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도덕 교육, 즉 앎과 실천을 함께하는(지행병진 : 知行竝進)의 학문을 집안 사람들도 처음에는 납득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과거를 앞두고 이황에게 과거 시험을 위한 수업을 받으러 왔다가 그가 과거와는 상관없는 경학을 중심으로 가르치자 되돌아간 생도가 많았다고 한다.
11. 도산서당에서의 생활
나는 항상 오래된 병고에 사로잡혀 있으니, 비록 산에 있다 해도 마음대로 글을 읽지 못한다. 깊은 아픔을 견디며 오래 숨을 고르고 나면, 때로는 육신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편하여지며, 몸과 마음이 맑게 깨어나서, 세상을 돌아봄에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이끌고 방을 나서서 '헌'(암서헌)에 이르고, '당'(정우당)을 구경하고, '단'을 거닐고 '사'(절우사)'를 찾고, 밭에 나아가 약초를 심고, 숲을 헤쳐 꽃도 따고, 혹은 돌 위에 앉아 샘물도 만져보고, '대'(천연대, 운영대)에 올라 구름도 바라보고, 혹은 물가 바위(반타석)에 기대 고기 노는 것도 구경하고, 물 위에 배를 띄우고 앉아 갈매기도 희롱하여 보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고, 눈길 가 닿는 것마다 살펴보고, 좋은 경치를 만나 흥에 취하여 노닐다가 돌아오면, 집은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고, 책은 벽에 가득하여,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이미 알아낸 것은 따르고 새로 찾은 것은 닦아서 마음으로 깨우치기를 기다리다가 어떤 때는 밥 먹는 것까지 잊을 정도이다.
참고도서 :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학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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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7.16
  • 저작시기20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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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2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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