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토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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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토지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들어가는 글

I. 토지관련 기사를 통해 살펴본 삼국시대의 토지제
1. 고구려(高句麗)
2. 백제(百濟)
3. 신라(新羅)

II. 통일신라기의 토지제도
1. 관료전(官僚田)
2. 후기녹읍(後期祿邑)
3. 정전(丁田)

나오는 글

본문내용

.
로 봤을 때 관리들에 의해 임의로 할당할 수 있는 토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연이 받아 갖는’ 역사가 있었음을 명칭에서 반영하고 있으며 이는 앞에서 언급한 성덕왕 21년 정전지급과 연결된다. 토지와 인민은 모두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이란 기본적인 이데올로기가 존재하는 가운데 전통적으로 민이 보유하고 경작해온 땅에 대해서 국가가 양전하여 토지문서를 마련해주고 보유자의 소유권을 인정해줄 때 백성들은 그 토지를 왕이 준 당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효과적인 조세 징수와 부역 및 군역의 징발을 위해서 주민의 생존기반인 논과 밭이 왕이 준 땅임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회경제적인 분화가 촉진되고 국가와 민의 관계가 정립되면서 민의 토지소유권을 공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나오는 글
삼국시대의 토지제도를 형성한 요인은 대체로 두 가지로 보인다. 그 첫째는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그에 따른 공동체적 생활의 해체이다. 삼국의 초기에는 토지에 따라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고정된 토지를 소유하고 그 곳에서 지속적으로 경작하기에는 생산력이 낮았기 때문에 토지 소유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농업생산력이 향상되면서 개별농가들이 농업경영의 단위가 되었고 그 결과 공동체적 생활이 해체되었다. 따라서 과거는 비교적 평등했던 농민들 간에 계층화가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토지에서 빈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 가지 요인은 왕실에 충성하는 귀족들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토지의 제공이다. 각 나라들은 나라에 충성하는 귀족에 대하여 일정한 보상을 함으로써 그들의 지속적인 충성을 보장받아야 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전공에 대하여 상을 수여함으로써 전쟁 수행의 효율성을 도모하였다. 이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경제적 기반이 되는 토지 자체와 식읍 등이 큰 매력을 지녔으며, 귀족들은 이들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토지 소유를 확대하였다.
4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한반도에서 고대국가로 발전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 안에서 각축을 벌였다.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수용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해서 노력하였는데, 기존의 지방 지배세력은 국왕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중앙에서 관료체제를 수립하였으며 지방행정체계 정비해나갔다. 처음에는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주변지역을 약탈하다가 농업이 발달하면서 좋은 토지의 확보를 목적으로 전쟁. 전쟁을 효과적으로 마련하기 위해서 각종 제도는 더욱 발전하였고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국가는 생산력 증대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위업을 달성한 것은 신라였다. 신라는 통일 이후에 변화한 사회경제적 여건을 바탕으로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줘야 했기 때문에 관료전을 지급하고, 기존의 귀족들의 기반이었던 녹읍을 혁파하였다. 후에 다시 녹읍이 부활하였지만 이는 60여년간의 경험을 통해서 이전과 같이 전권을 휘두르는 녹읍이 아닌 관료전과 그 성격이 유사하였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공왕 대의 96각간의 난도 경제적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진골귀족간의 치열한 다툼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전쟁의 공로자인 일반민은 공민으로서 그 지위가 향상되고 국가와의 관계가 재정립되면서 경작지의 토지소유권을 국가로부터 인정받기에 이름.
그러나 신라 하대 사회의 기점을 선덕왕으로 잡고 있는 만큼 점차 진골 귀족간의 상쟁이 격화되어 국가의 행정력이 이완·마비되면서 녹읍은 또다시 녹읍주의 자의적 수탈대상이 되었고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녹읍은 지방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호족들의 경제기반으로 쉽게 전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인다.
토지제를 살펴보는 것은 경제사적으로 고대사회 토지제가 한국사에서 갖는 의의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의 발전과정과 신라의 통일, 그리고 신라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기까지의 총체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유용한 관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업일 것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가’에 대한 답은 진보한다, 진보하지 않는다 이기 보다는 ‘진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역사’라는 말로써 마무리 하고 싶다.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5.6.7.9권,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8)
김기흥, 『삼국 및 통일신라 세제의 연구』, (서울; 역사비평사, 1991)
이희관, 『통일신라토지제도연구』, (서울; 일조각, 199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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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12
  • 저작시기2007.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4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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