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간의 결혼 합법화에 대한 찬반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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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003" 자료집 중)
1994.02.07 "초동회" 해체 후 한국 남성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인 "친구사이" 발족. 회장 이후명
1994.09.11 "친구사이"가 연남동에 사무실 마련해 공식적인 인권운동단체로서의 규모 갖 춤
1994.11.27 여성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인 "끼리끼리" 발족. 회장 전해성
1995.03.27 연세대학교 학보에 서동진이 동성애자회원 모집 광고를 냄.
대학 동성애자 모임으로는 국내 최초
1995.06.26 4개 단체 연합인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이하 동인협) 결성, 기자회견 가짐
1997.06.06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터넷 사이트 엑스죤 http://exzone.com 오픈
1997.11.02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하 대동인) 출범
1998.02.20 한국 최초의 동성애 전문지 월간 <버디> http://buddy79.com 창간
2000.09.17 <일간스포츠>에 홍석천의 커밍아웃 폭로 기사가 실림
2000.09.22 홍석천, MBC <뽀뽀뽀> 출연정지 통보 받음
2000.09.27 홍석천과 이의정의 인터뷰 비디오가 각종 연예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되는 것 으로 홍석천 공식 커밍아웃
2000.10.04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 발족식 및 기자회견
2001.07.31 "동성애자 차별반대 공동행동"(이하 동차공)의 발족식과 기자회견
2001.09.14
~09.16 제2회 퀴어문화축제 - 무지개 2001이 홍익대학교 일대에서 개최됨. 15일의 거리 퍼레이드엔 약 200여 명 참가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동성애 역사
한국에서 역사적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는 신라 제36대왕 혜공왕이다. 그는 경덕왕의 적자로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은 태종무열왕의 직계 손으로 마지막 임금이다. 그는 8세에 왕위에 올라 여자같이 행동하고 옷 입기를 즐겨하였으며,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원래 왕은 여자였는데 남자의 몸을 빌어 왕이 됐으니. 나라에 불길하다하여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혜공왕은 여자같이 행동해서 죽은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한다. 오랜 세월 짓눌려 지내던 귀족세력의 반격 속에 희생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혜공왕과 비슷한 말로를 보여준 임금은 고려 제31대왕 공민왕이 있다. 왕은 몽고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러다가 '자제위' 라는 궁정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기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 왕이 궁정에서 여러 귀족 미남 청년들과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고. 평소에도 여자 옷을 입고 치장하기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동성애를 했다고 해서 조정 안팎에서 비난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왕조에서 제7대왕 목종도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이 보여 진다. 그 외 공식적 기록에 남겨진 동성애자의 모습은. 신라 원성왕대에 묘정이라는 미소년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오는데 그는 용모가 출중하여 전국적으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신라 고관의 사랑과 총애도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 조선실록에 세자빈 봉씨가 후궁들과 오랫동안 동성애를 즐기다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도 한다. 기록으로 남겨진 사건들은 대부분 왕실에서 행해진 것들이나, 독수공방하는 궁녀들 사이에 동성애가 이루어질 가능성과 백성들 사이에 암암리에 동성애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사당패의 어리고 귀여운 남아나 여아들에 의해 동성애 거래가 행해졌을 수도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동성 간의 사랑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우선 화랑에 관한 이야기로 "화랑도에서 동성애적 행위와 사랑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라고 일본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고, 우리나라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문학작품에서 동성애의 감정을 기록한 것은 고려시대 경기체가 한림별곡에서 또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외 현대 문학작품에서 동성애 묘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유교적 관념이 동성애를 억압하는 주요 장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경전 어느 곳에서도 동성애를 비난하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시대와 지역에서 존재해 온 동성애자의 삶이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그 역사를 관통하면서 동성애자들이 살아왔다는 증거다.
세계에서의 동성애의 역사
고대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저서인 [플라톤의 대화]에서 향연이라는 글을 언급하고 있다. 그 글에는 남성들 간의 동성애를 이성간의 사랑보다 더욱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찬양하는 부분이 주를 이룬다. 게다가 그리스 시대의 도자기에는 남성들 간의 동성애 장면이 그려진 것이 많다. 로마의 황제인 카이사르(시저)도 동성애로 유명했다. 심지어 [모든 여자의 남자, 모든 남자의 여자]로 통했다고 한다. 중세 기독교사회에서도 수도원에서의 남성 수도사끼리의 동성애는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일이었다.
멜리네시아나 인디언 사회, 아프리카의 부족 중에는 동성애적인 사회적 제도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분류하지 않는 이론이 나타나게 되는데, 영국의 헨리 해블록 엘리스(1859~1939)는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물론 동성애자들도 자유로운 성적 표현을 할 권리가 있다. 동성애는 선천적인 특질이며 자연스러운 형태의 성적행동이다.]라고 주장했고, 오스트리아의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며 상담을 요구한 여성에게 [동성애는 병이 아니다]라는 내용의 답을 했을 정도이다. 그리고 미국의 알프레드 C. 킨제이(1894~1956)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남성의 4%가 완전한 동성애자이고, 37%의 남성이 어느 정도의 동성애 경험이 있으며, 13%의 남성은 이성애보다 동성애 경험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3%의 여성은 완전한 동성애자 여성이었고, 28%의 여성은 어느 정도의 동성애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는 동성애를 더 이상 정신질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키워드

게이,   호모,  
  • 가격1,9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7.08.23
  • 저작시기2007.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5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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